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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객 구하다 숨진 여성 구급대원 8개월째 납골당에 안치, 왜

'19년 헌신' 강연희 소방경 뇌출혈 사망

남편도 소방관…유족 '위험순직' 신청

인사혁신처 "재해보상심사 일정 안 잡혀"

동료, 청와대 게시판 "현충원 안장" 청원

소방공무원 4만명, 위험순직 여부 촉각

"일하다 아파도 개인 탓하는 현실 바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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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객을 구하다 숨진 여성 구급대원의 유골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19년간 구급대원으로 일한 전북 익산소방서 강연희(51·여) 소방경은 지난 5월 본인이 구한 취객에게 주먹으로 머리를 맞고 폭언을 들은 지 한 달 만에 숨졌다. 강 소방경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국립묘지에 안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의 유골은 사망 후 8개월째 전북 군산의 한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 국립묘지에 가려면 '위험직무순직'이 인정돼야 하는데, 아직 심사조차 이뤄지지 않아서다.


11일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강 소방경에 대한 위험직무순직 심사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인사혁신처 재해보상심사담당관실 관계자는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심사가) 늦어지고 있다"며 "대한의사협회 자문 결과 등 최대한 자료를 준비해 조속히 안건을 상정하겠다"고 말했다.


강 소방경은 지난 4월 2일 익산역 앞 도로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윤모(48)씨를 119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기다가 봉변을 당했다. 윤씨는 응급실 앞에서 강씨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년, XX를 찢어버린다" 등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된 윤씨는 폭력 전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건강하던 강 소방경은 이 사건 이후 불면증·어지럼증·딸꾹질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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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일 전북 익산시 원광대병원 응급실 앞에서 윤모(48)씨가 자신을 구해준 구급대원 강연희(51·여) 소방경의 머리를 때리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 캡처. [사진 전북소방본부]

병원에서는 "폭행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율신경이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4월 24일 뇌출혈로 쓰러진 그는 5월 1일 숨졌다.

강 소방경의 남편 최태성(52)씨도 현직 소방관(김제소방서 화재진압대원)이다. 최 소방위는 아내가 숨진 뒤 각각 초등학교 6학년,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아들을 혼자서 키우고 있다. '소방관 부모'를 자랑스러워한 두 아들은 어머니가 본인이 구한 사람 때문에 숨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최 소방위는 지난 10월 23일 인사혁신처에 '위험직무순직'을 신청했다. 앞서 공무원연금공단은 8월 30일 강 소방경의 죽음을 '일반순직'으로 인정했다. 공무상 재해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공무원재해보상심사위원회에 강 소방경의 안건을 올리지 않고 있다.


인사혁신처는 최근 익산소방서 측에 '강 소방경은 생전에 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안 받았느냐' '병가를 길게 안 낸 이유가 뭐냐' 등을 물으며 자료를 요청했다. 소방서 측은 "강 소방경이 숨지기 전까지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욕설을 들었다고 해서 심리 치료를 받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또 "구급 인력이 부족해 강 소방경만 장기간 병가를 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위급한 환자가 있을 때만 출동하도록 조치했다"는 게 소방서 측의 설명이다. 더구나 강 소방경과 같은 팀(3명 1팀) 30대 남자 구급대원도 지난해 12월에 이어 지난 4월 폭행을 당해 팀장인 강 소방경도 현장을 비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방청 안팎에서는 '인사혁신처가 위험직무순직 처리를 안 해주려고 일부러 트집을 잡고 있다'는 비관론과 '위험순직을 승인해 주기 위해 자료를 꼼꼼히 모으는 것 아니겠냐'는 낙관론이 교차한다.


지난달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폭행·폭언으로 인해 사망한 119구급대원의 위험직무순직을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현장에서 쓰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험직무순직 처리가 지연된다면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라는 내용이다. 강 소방경의 직속 상관이던 정은애 인화119안전센터장이 올린 글이다. 그는 해당 글에서 "강 소방경을 현충원에 안장시키고 흙을 덮어주는 날 동료들은 비로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1일 현재 2800여 명이 동의를 눌렀다.


위험직무순직은 공무원이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때 인정된다. 소방공무원·경찰·군인·교도관 등이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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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직무순직이 인정되면 강 소방경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국가 유공자 예우를 받는다. 국가 유공자가 되면 일반순직보다 더 많은 보상금과 연금이 유족에게 지급된다.

소방공무원 4만여 명은 강 소방경의 위험직무순직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상적으로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는 소방관들이 트라우마·우울증·불면증 등을 앓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무와 무관한 개인 질병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사혁신처는 지난 9월 위험직무순직 공무원의 요건을 확대한 공무원 재해보상법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외상(外傷)으로 사망하지 않는 한 순직 판정을 받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공무상 재해의 인과 관계를 공무원 유족이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과 소방청, 대한변호사협회 주최로 '고위험 현장근무 소방공무원의 재해보상제도 개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하종봉 부산소방안전본부 보건안전팀장은 "그간 의학적으로 원인 불명이면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며 "앞으로는 취업 당시 건강 상태와 사망 당시 정황 등도 폭넓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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