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데, 오시라 말도 못하고” 산수유꽃 만발한 구례 산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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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봄이 왔다. 강원도가 폭설로 몸살을 앓는 사이, 여기 지리산 자락은 꽃으로 이미 환하다. 대관령 춘설은 때가 늦었다 했는데, 지리산에 내려온 봄은 철이 이르다. 일러도 한참 이르다. 여느 해보다 열흘 일찍 산수유꽃이 봉오리를 피웠다.
해마다 3월 중순이면 노고단 아랫마을에 들어와 봄맞이 의례를 치렀었다. 골짜기마다 들어선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란 기운으로 돌아온 봄과 반가이 재회했었다. 올해는 1주일 먼저 지리산에 들었다. 예년보다 한참 이르다는 화신(花信)을 듣고서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번째 찾아온 봄, 전남 구례 산골 마을의 산수유꽃은 올해도 고왔다. 인간사 시름 따위는 나 몰라라 하듯이, 시치미 뚝 떼고 그렇게. 3월의 색깔은 역시 노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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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과 서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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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산동면의 마을들은 지리산 마루금을 병풍처럼 두른 산골 마을이다. 서부 능선 만복대(1433m)와 주 능선 노고단(1502m) 사이 아랫자락에 기대어 들어섰다. 논보다는 밭이 많은, 작물보다는 산나물이 더 흔한 전형적인 산촌이다. 이름부터 남다르다. 산동(山洞)이라는 이름이 산골 마을이라는 뜻이다. 십수 년째 봄 기척이 올라오면 산동을 드나들었는데, 들 때마다 좋은 기운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지리산 노고 할매의 전설이 깃든 노고단과 만 가지 복이 들어온다는 만복대의 기운을 내려받은 터다.
산동의 마을들은 만복대와 노고단 사이 계곡에서 발원한 개천을 따라 모여 있다. 이 개천이 서시천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서시천은 구례 읍내를 끼고 돌아 섬진강에 몸을 푼다. 그러니까 산동의 마을들은 섬진강 지천 서시천 상류의 산골 마을이다. 서시천(西施川)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서시(西施)’는 중국 4대 미인으로 통하는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사람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중국 고대 인물의 이름이 어쩌다 지리산 남서쪽 자락의 개천에 매겨졌을까. 내력을 아는 사람은 없으나 개천 품은 풍경만큼은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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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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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의 마을들을 흔히 ‘구례 산수유 마을’이라 부른다. 서시천 상류부터 월계마을, 상위마을, 하위마을, 대음마을, 반곡마을, 평촌마을, 원좌마을, 상관마을, 중동마을, 사포마을까지 그리고 19번 국도 건너편의 현천마을과 원동마을도 넣어 산수유 마을이라 이른다. 여느 마을의 소나무처럼 산수유나무가 흔한 마을들이다. 구례군청의 2018년 자료에 따르면 전국 산수유의 62.6%가 구례에서 생산되며, 산동면에만 9만5436그루의 산수유나무가 산다.
예부터 산수유 열매는 신비의 영약으로 통했다. 몇 해 전 어떤 아저씨가 TV 광고에서 “남자한테 참 좋은데” 타령을 했던 건강식품도 산수유 열매로 만든 것이었고, 열병 앓는 자식 살리겠다고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김종길, ‘성탄제’ 부분)’ 붉은 열매도 산수유 열매였다. 산동의 마을에서는 산수유 열매 팔아다 자식을 학교에 보냈다. ‘대학 나무’라는 별명이 그렇게 나왔다. 산수유 열매를 약으로 쓰려면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만 한 열매를 까서 씨를 발라야 한다. 산수유꽃 피는 마을 아낙의 손가락에는 마디마디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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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산수유 열매 시세가 예전 같지 않다. 값싼 중국산이 대거 수입되어서다. 옛날처럼 악착같이 씨를 발라내지 않으면서 산수유 마을 아낙네의 피멍도 많이 가셨다. 대신 마을의 명성은 높아졌다. 이번엔 꽃 덕분이다. 산수유꽃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이다. 산수유꽃 피었다고 하면 겨우내 갇혀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 지리산 아랫마을로 몰려온다. 산수유 마을이 노란 기운으로 아득하면, 비로소 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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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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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산수유나무처럼 꽃이 먼저 피는 식물은 대개 꽃송이가 잘다. 하도 잘아서 벌과 나비를 잘 부르지 못한다. 하여 산수유나무는 꽃을 두 번 피운다. 노란 겉꽃이 먼저 벌어지고, 겉꽃 안에서 노란 속꽃잎 수십장이 다시 열린다. 두 번째 개화 때 속꽃잎이 무더기로 피어나 벌과 나비를 꾄다. 봄날 아침이면, 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 꽃이 어지러이 흔들린다. 멀리서 보면 아지랑이가 몽개몽개 피는 것처럼 비치는 까닭이다.
올해는 예년보다 산수유꽃이 일찍 피었다. 보통 3월 중·하순께 만개하는데, 올해는 1주일에서 열흘 정도 이르다. 3월 8일 이른 아침 사포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도 “최소한 1주일은 먼저 피었다”며 “주말(13, 14일)이 넘어가면 질 것 같다”고 말했다. 산수유꽃은 절정이 넘어가면 노란색이 옅어진다. 채도가 낮아지면서 지금과 같은 샛노란 풍경도 잦아든다. 올봄 산수유꽃은 왜 일찍 피었을까. 겨울이 안 추웠다. 구례군청에 문의하니 겨울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높았다. 특히 2월은 예년보다 2.3도나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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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오전 9시. 반곡마을은 이미 상춘객으로 붐볐다. 예년보다 최소 1주일 앞서 재현된 풍경이다. 산수유 마을의 봄이 재미있는 건, 해를 넘기면서 명소가 바뀐다는 데 있다. 십수 년 전에는 상위마을이 제일 먼저 알려졌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산촌과 고즈넉한 돌담길 풍경이 그윽했다. 상위마을 다음에는 현천마을이 유명세를 치렀다. 마을 어귀 저수지에 드리운 노란 반영이 전국에서 사람을 불러 모았다. 서너 해 전부터는 상위마을 아랫동네인 반곡마을이 떴다. 반곡마을과 대음마을 사이로 서시천이 흐르는데, 서시천으로 내려가 만복대를 올려다보는 자리가 신흥 명당으로 떠올랐다. 만복대에 춘설이라도 내리면 서시천변의 노란 풍경과 만복대의 하얀 풍경이 한 폭에 담기는 동양화가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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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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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둘러보면 참 좋은데, 오시라고 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합니다.”
서시천변 산수유꽃을 내려다보며 김인호(59) 구례군청 홍보팀장이 긴 한숨을 쉬었다. 산수유꽃 축제는 올해도 열리지 않는다. 행사장 출입을 막은 건 아니지만, 시끌벅적한 이벤트는 없다. 외려 호젓하게 꽃놀이를 즐길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지역 상인에겐 타격이 크다. 산수유 마을 어귀 ‘지리산 온천마을’은 산수유꽃 만발하는 3월이 성수기다. 지난 세월 온천마을 상인들은 3월 한 달 매출로 1년을 살았다. 하나 3월 7∼9일 온천마을 상가는 절반 이상이 불이 꺼져 있었다. 온천 영업 금지 조처가 풀리지 않으면서 온천 리조트 여러 곳이 문을 닫았고, 대형 버스가 안 들어오면서 상당수의 대형 식당도 장사를 접었다. 온천마을에서 개별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는 ‘노고단 게스트하우스&호텔’의 정영혁(59) 대표는 “그나마 영업이 된다는 이곳의 매출이 코로나 사태 이전의 절반 정도”라며 “식당이고 호텔이고 내놓은 곳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올해도 봄이 오셨다. 새 계절이 시작되었다. 당연한 순리다. 이 당연한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1년 전에는 영 어색했던 마스크가 제법 익숙해져서일까. 봄이 돌아와 줘 고맙고, 예전처럼 맞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구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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