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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로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그녀가 본 희망은?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는 제우스가 열지 말라고 경고한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슬픔과 질병, 가난, 전쟁, 증오, 시기 등 온갖 악을 퍼지게 하였죠.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아 그나마 ‘희망’만은 남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영화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고난이 차례로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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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같은 철학 교사인 남편이 있습니다. 거기에 불안증에 시달리는 엄마가 있죠.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은 그녀의 일상에 커다란 위기가 하나둘씩 찾아오는데요. 그것은 바로 남편의 고백이었죠. 오랫동안 만나온 여자가 있고, 앞으로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지도 못한 고백이요.


보통 이런 전개라면 뺨을 때리거나 욕설을 하며 (점을 찍고) 복수를 다짐할 텐데…. 예민한 칼날이 쓰다 보면 닳고 닳아서 무뎌지는 것 처럼 나탈리도 그랬던 것일까요? 나탈리의 반응이 참 의외입니다.


“왜 나한테 그걸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


(중략)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이후 출판사에서도 갑자기 책을 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자신이 아끼던 제자 파비앵(로만 코린카 분)에게선 그녀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교육 신념이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불안증에 시달리던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하죠. 이쯤 되면 어느 한 시점에서 감정이 폭발할 수 있을법한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떤 상황들에 대해서도 감정이 요동치지 않습니다. 이는 그녀의 말들을 통해서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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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나탈리와 파비앵의 대화 중에서


그녀의 내면에 어떤 묵직한 것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렇게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지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감정을 발산하기보다 수렴하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프랑스의 국민배우라 불리는 이자벨 위페르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2)', '클레어의 카메라(2017)'라는 작품에서 출연한 적이 있죠.


감독 미아 한센 러브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그녀를 생각하며 작업했다"며, "그녀는 프랑스 최고의 배우다. 평소에 그녀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연약한 모습, 때로는 무심한 모습까지. 이자벨 위페르가 아닌 다른 배우는 상상한 적이 없다"며 그녀에게 존경심을 전했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감독의 말에 크게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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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재미로는 극 중 나탈리가 철학교사로 나오는 만큼 철학자들의 책을 만날 수 있는데요.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장 자크 루소의 『신엘로이즈』 등 고전 문학책들이 등장합니다.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책 구절들은 마치 나탈리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죠. 한편으론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러한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서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수업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판도라의 항아리에 남은 희망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어떤 고통을 겪어도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의미와 ‘헤어나오지 못할 고통 속에서 바라는 헛된 희망’이라는 의미죠. 나탈리는 두 가지 의미 중 어떤 ‘희망’을 보았을까요?


TMI. '판도라'는 극 중 나탈리의 엄마가 키웠던 고양이 이름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탈리가 임시로 보호하기도 했죠.





현예슬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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