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탄 여성, 립스틱 바르고 마스카라까지…민폐일까?
염지봉선화가
화분에 저녁 이슬 각시방에 어리고,
여인의 열 손가락 어여쁘고도 길어라.
대절구에 찧어서 장다리잎으로 말아
귀고리 울리며 등잔 앞에서 동여맸네.
새벽에 일어나 발을 걷다가 보니
반갑게도 붉은별이 거울에 비치네.
풀잎을 뜯을때는 호랑나비 날아온 듯
가야금 탈 때는 복사꽃잎 떨어진듯.
토닥토닥 분 바르고 큰 머리 만질때면
소상반죽 피눈물의 자국처럼 곱구나.
이따금 붓을 들어 초승달 그리다 보면
붉은 빗방울이 눈썹에 스치는 듯 하네.
머리를 매만지며 바라본 거울 속에서 시인의 손톱은 만발한 꽃잎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규방 깊은 곳에서 어여쁜 꽃물이 들기를 기다리던 시인의 설렘이나, 진즉에 팔순을 넘긴 친정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 곱게 화장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봄꽃이 흐드러지니 꽃 색 립스틱이라도 살까 기웃거리는 내 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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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곤 한다. 앞사람의 뒤 꼭지만 보일 정도로 혼잡했던 출근길의 전철을 탔던 어느 날이었다. 환승역에서 우르르 사람이 내리고 난 다음이었다. 그제야 건너편에 앉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세수를 하고 온 듯 파리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여인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놓는다.
‘아! 핑크빛 화장 파우치구나.’ 용감하게도 커다란 헤어롤을 집더니 이내 앞머리에 돌돌 말기 시작한다. 거울도 안 보고 아주 잘도 한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킨, 로션을 뺨이 아프도록 톡톡 치는가 했더니 한·중·일 여성을 사로잡았다는 쿠션 파운데이션을 꺼내 열심히 두드린다.
어느새 창백했던 낯빛은 화사하고 뽀얗게 변신한다. 점점 흥미가 생겨 열심히 보고 있는데 주위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옆자리의 어르신과 쓸데없는 호기심만 가득한 나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하긴 바쁜 출근길에 누가 남의 변신을 눈여겨볼까 싶긴 하다. 놀라운 변신은 지금부터다. 다소 희미한 인상을 주던 여인이 잘 익은 살굿빛의 볼 화장을 하고 나니 생기가 펄펄 나는 것만 같은 거다.
요즘엔 볼 화장을 눈 아래쪽에 하는 게 유행인가보다. 소싯적엔 화장에 관심도 많았지만, 중년에 접어들고부터는 예의상(?) 화장을 하니 저런 화장법을 알 리가 없다. 신기하게도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그 어렵다는 아이라인까지 완벽하게 단번에 그려내는 기술을 선보이더니 마지막 화룡점정인 다홍빛 립스틱으로 마무리한다.
이제 머리에 말고 있던 헤어롤만 풀면 완성이다. 나로 말하면 공짜로 생생한 메이크업 수업을 받은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거울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던 여인이 휴대폰을 꺼내 든다.
“이모님, OO가 감기가 온 것 같으니 신경 좀 써 주시고요, 냉장고에 이유식 만들어 놓았고요, 해열제는 서랍장 위에...” 머리를 조아려가며 부탁을 하고 또 한다. 워킹맘의 아침은 보나 마나 바빴을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를 떼어놓고 여유 있게 화장을 하고 출근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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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본의 도큐 전철에서는 이런 광고를 해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도시의 여성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꼴불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의 화장은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으니 자제하라는 광고다.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일었고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SNS 설전까지 벌어져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고 한다.
10분만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라는 사람도 있고, 여성의 신비감을 무참히 깨뜨리는 행동이라며 동조하는 사람도 있다. 또 이게 무슨 민폐가 되느냐, 자유국가에서 이런 행동도 못 하느냐, 얼마나 바쁘고 힘들면 그럴까 이해는 못 해줄망정 광고까지 내며 비난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그 광고는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이웃 나라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다니…. 사실 우리도 명확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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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가족과 지하철 화장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침 시간이 얼마나 바쁘면 그랬겠냐,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 보는 것도 재밌더라는 나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젓는다. 바쁜 출근길은 물론이오, 퇴근 시간 무렵에도 화장을 해대는 통에 눈살이 찌푸려진단다. 잠시나마 눈을 붙이고 앉아서 가고 싶은데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당신은 그래서 꼰대, 아재 소리를 듣는 거라며 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전 아무 생각 없어요. 혹시 화장품 가루가 내게 묻으면 모를까, 그냥 화장하는구나 하고 말죠. 요새 누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쓰나요?”
그야말로 삼인 삼색이다. 하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이 바쁜 세상에 지하철 화장이 대수인가 말이다. 쉼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진한 향수를 뿌리거나 분가루를 날리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난 왜 여인이 쓰던 살굿빛 볼 화장품을 어디서 파는지 그게 왜 궁금하지?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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