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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중앙일보

조계산 보리밥? 반찬 16가지 기사식당? 순천 여행 고민되네

조리대회 휩쓴 모던 한정식

형제 배빵 vs 3대째 찹쌀떡

마늘통닭 vs 닭구이 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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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했다. 왜 순천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없을까. ‘벌교 꼬막’ ‘강진 한정식’ ‘여수 갓김치’ 같은 브랜드가 물산 풍족한 순천에는 왜 없을까.

궁리 끝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혹시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바로 안 떠오르는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닌 것 같다. 순천은 늘 먹거리가 넉넉했기 때문이다. 순천만에서 걷어오는 갯것과 조계산에서 뜯어오는 나물만으로도 밥상이 가득 찬다. 더욱이 순천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다. 사람이 모이니 음식 문화도 발달했다. 앞서 열거한 남도 별미들은 사실 순천 별미이기도 하다.


‘일일오끼’ 여정을 짜는데도 애를 먹었다. 맛집 5곳으로는 어림없었다. 순천시청과 협의해 7곳만 골랐다. 빵집과 닭집은 2곳씩 넣었다. ‘일일열끼’로도 순천 여행은 모자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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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887m) 자락의 보리밥집이 40년째 듣는 말이다. ‘전국에 보리밥집이 몇 갠데 무슨 망발이냐’ 싶겠지만, 사연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 집 보리밥을 먹으려면 2시간 산행을 감수해야 한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보리밥집은 조계산 중턱 해발 600m 고갯길 위에 있다. 선암사에서 2.8㎞, 송광사에서는 3.3㎞ 거리다. 두 절집 모두 산길 따라 두 시간쯤 걸린다. 보리밥집이 걸터앉은 고개가 굴목이재(굴목재)다. 하여 ‘굴목이재 보리밥집’이라고도 한다. 진짜 이름은 ‘원조집 조계산 보리밥집’이다. 최근 굴목이재에 보리밥집들이 생겨 ‘원조집’을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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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산에 들어온 최석두(67)씨가 80년부터 가족과 함께 보리밥을 내고 있다. 가마솥에 밥 짓고, 산에서 뜯은 나물 무치고,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김치 담그고, 집에서 띄운 메주로 장을 담가 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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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짜리 보리밥 상에 딸려 나오는 반찬이 된장국 빼고 모두 12가지다. 무생채·매실장아찌·겉절이·오이무침·상추무침·머위나물·참나물·취나물… 모두 산에서 뜯어왔거나 텃밭에서 거둔 것들이다. 보리밥 한 공기를 고추장과 참기름 넣은 사발에 붓고 온갖 반찬 얹은 다음 숟가락으로 쓱싹 비비면 산채비빔밥으로 변신한다. 무슨 맛이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난다. 큰 사발 비우는데 10분도 안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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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의 고장 하면 강진부터 떠올리지만, 순천의 한정식 전통도 못지않다. 남도 밥상 문화의 총체가 한정식이어서다. 남도에서 순천만큼 크고 오래된 도시도 없다.

순천의 내로라하는 한정식 명가 중에서 순천시청이 추천한 집이 ‘신화정’이다. 2003년 개업했으니 내력은 길지 않다. 하나 김미자(57) 대표의 내공은 깊다. 신화정을 열기 10년 전부터 음식을 개발했다. 그 남다른 손맛으로 음식경연대회 수십 개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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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정식 같은데 꼭 그렇지 않은 게 신화정의 매력이다. 순천에선 집집이 순천만 갯벌에서 나는 칠게로 장을 담아 먹는다. 신화정도 칠게장을 담근다. 대신 2년 숙성한 게장을 내놓는다. 게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식감이 부드럽다. 짜지도 않다. 김 대신 감태에 싸 먹는 찰밥, 뽕잎과 찻잎으로 만든 나물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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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 자체가 흥미로웠다. 랍스터구이를 올린 한정식 밥상은 처음 받아봤다. 생고기·불고기·낙지구이·샐러드 등 나오는 음식마다 서양 레스토랑처럼 멋을 부렸다. 순천정원상(5만5000원, 3인 이상)을 받았는데, 반찬을 30개까지 세다 포기했다. 전날엔 예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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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은 빵도 각별하다. 가족이 운영하는 동네 빵집 두 곳이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에 꿋꿋이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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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차원의 명물 빵집은 1928년 개업한 ‘화월당’이다. 화월당의 찹쌀떡(1200원)과 볼카스테라(1700원)는 방방곡곡에서 택배로 받아먹는 ‘국민 간식’이다. 숙성한 단팥 소로 속을 꽉 채운 찹쌀떡은 ‘옛날 모찌’의 맛이 고스란하고, 볼카스테라는 일본 화과자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재현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화과자 집에서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맛의 계보다. 일본인 가게에서 일했던 고(故) 조천석(1914∼2009)씨 가문이 3대째 대물림해 화월당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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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모 과자점’은 순천시민이 사랑하는 동네 빵집이다. 제빵 경력 30년이 넘는 조계훈(59)·훈모(55)씨 형제가 주인이다. “‘훈모’가 ‘계훈’보다 빵집과 더 어울린다”는 이유로 동생 이름을 간판에 걸었다. 대표 메뉴는 식감이 독특한 배빵(4000원)이다. 순천 낙안의 배를 깍두기처럼 썰어 넣어 빵을 물면 배가 씹힌다. 유기농 밀가루를 쓰고, 광양 매실로 만든 매실청과 꿀을 졸여 단맛을 낸다. 지난달 24일 방문했을 때 정문 옆에 ‘1994년 개장 이후 2,670,608명이 다녀갔다’고 쓰여 있었다. 형제가 여태 한 번도 안 싸웠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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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이 닭의 고장인 줄은 몰랐다. 순천이 낳는 전국구 통닭집은 알고 있었는데, 순천에 닭구이의 전통이 내려오는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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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통닭. 2015년 TV 프로그램 ‘백종원의 3대 천왕’에 출연하고서 전국 명소로 떠오른 ‘풍미통닭’이 있다. 통째로 튀긴 닭에 으깬 생마늘을 바른 마늘통닭(1만8000원)을 먹으러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든다. 사실 풍미통닭은 84년 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에 문을 연 노포다. 35년 역사에도 노포라고 쓴 건, 대를 이은 동네 통닭집이어서다. 통닭집으로선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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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닭집이 방송에 나간 뒤 광주에서 직장에 다니던 아들 박세근(36)씨가 어머니 강영애(62)씨의 고향 가게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주방에서 일한다. 아들 박씨에 따르면 하루에 닭 380마리를 튀긴 적도 있단다. 큰 닭(18호)을 써서 푸짐하고, 겉에 바른 생마늘이 느끼한 맛을 잡아준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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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닭구이의 전통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부터 순천은 남도의 길목이었다. 여수·보성·고흥 등지에서 한양을 가려면 순천 북쪽의 청소골을 지나야 했다. 그 시절 과거 보러 가는 남도 선비 덕분에 닭구이가 개발됐다. 닭을 삶지 않고 구우면 조리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그 닭구이가 오늘도 내려온다. 순천시가 닭구이 거리로 지정한 청소골에 닭구이 집 20여 곳이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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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골에서 제일 유명한 닭구이 집이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산수정’이다. 순천만 미나리에 닭구이와 꼬막무침을 싸 먹는 ‘닭꼬미 삼합정식(1인 3만9000원, 3인 이상)’이 대표 메뉴인데 밥상을 받고서 깜짝 놀랐다. 반찬이 30가지가 넘었다. 모두 김미라(61) 대표가 손수 만든 작품이다. 시댁에서 받아온 120년 묵은 씨간장이 비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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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사식당일 듯싶다. 호남고속도로 승주IC 바로 앞에 있는 ‘진일기사식당’은 전국 기사식당의 전설이다. 식당 이름 ‘진일’이 ‘진입로에서 제일’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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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가 김치찌개 백반 하나밖에 없다. 하나 여느 백반과 차원이 다르다. 반찬만 16가지다. 여기에 된장국과 김치찌개가 더해진다. 8000원짜리 밥상이라기엔 차라리 황송하다. 84년 배일순(86) 할머니가 시작했고, 지금은 며느리 서정엽(53)씨가 물려받았다.

배추·갓 같은 채소는 텃밭에서 키운 것이고, 꽃게장·계란찜·열무김치·갓김치 등 반찬도 모두 직접 만든 것이다. 이 집의 자랑인 전어숙젓도 손수 담근 것만 쓴다.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김치찌개에는 미치지 못한다. 1년 가까이 묵은 김치에 동네에서 키운 돼지의 뒷다릿살이 들어가는데, 국물이 얼큰하면서도 달다. 며느리 서씨가 “찌개용 김치를 담글 때 매실청을 듬뿍 넣는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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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식당이지만, 관광객 손님이 훨씬 많다. 그래도 기사식당의 예법은 지킨다. 공깃밥 한 그릇 추가는 공짜다. 세 그릇째부터 1000원씩 받는다. 너무 많은 손님이 “공깃밥 또 추가”를 외쳐서다. 할머니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이다. 오전 7시 문을 연다.

순천=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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