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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중앙일보

전직 홍상수 영화 PD, 실직 후유증 감독 데뷔작에 풀었다

5일 개봉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전 홍상수 사단 영화 프로듀서

김초희 감독의 실제 경험 토대

실직한 40대 프로듀서 성장담


반찬가게 하려다 감독 데뷔해

"홍 감독 영향? 열심히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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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다 갑작스레 실직했다. 고달팠던 마음을 영화에 담아 이겨냈다. 그렇게 늦깎이 감독 데뷔작을 개봉하려는데 이번엔 전염병이 돌아 극장가가 텅 비었다.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개봉(5일) 전 만난 김초희(45) 감독은 그런데도 씩씩했다.


“코로나가 막 터졌을 땐 심란했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심란해요. 오히려 절대 못 잊을 것 같아요. 늦은 나이에 데뷔하는데 이런 시국이라니, 누구나 겪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질박한 부산 사투리, 자신의 영화보다는 감염자 수며 부족한 병상 걱정이 앞서는 모습이 영화 속 잔정 많은 찬실(강말금) 판박이었다.



유명감독 돌연사로 실직한 프로듀서


영화의 주인공 찬실은 40대 영화 프로듀서. 오랫동안 함께 일한 유명 감독이 돌연사하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네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집도, 남자도 없고 일마저 끊긴 찬실인데 가만 보면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의지한다.


■ 김초희 감독이 발굴한 페르소나, 강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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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에서 김초희 감독의 페르소나 역할을 하는 배우 강말금. 김 감독과 같은 40대, 부산 출신이다. 김 감독은 김도영 감독(‘82 년생 김지영’)의 단편 ‘자유연기’에서 주연을 맡은 그의 독백 오디션 연기에 반했단다. 연극 경력 14년, 영화 ‘우상’에서 한석규의 아내로 출연했지만 장편영화 주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비슷한 점이 많아요. 어릴 때 저희 외할머니가 부산 초량에 수정아파트 살았는데 강말금 배우도 거기 살았더라고요. 서로 고생 많이하다 만난 사람이라 더 반가웠죠.” 김 감독의 말이다.


‘발연기’ 댓글에 상처받는 소피, 오늘만 사는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솔직하고 다정한 불어 선생 영(배유람), 장국영을 자처하는 의문의 사내(김영민)까지. 굵직한 사건보단 석류알처럼 톡톡 튀는 인물들이 재밌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감정들이 모과처럼 무심히 무르익어 기분 좋은 잔향을 남긴다.


김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써 지난해 부산영화제 한국감독조합상, KBS독립영화상, CGV아트하우스상 3관왕, 서울독립영화제에선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 관두고 반찬가게 할까 고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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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실제 그가 홍 감독의 제작사 전원사에서 프로듀서로 7년여 일하다 4년 전 나왔던 경험이 토대다. 그는 2007년 프랑스에서 촬영한 홍 감독의 영화 ‘밤과 낮’ 연출부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등 홍 감독의 영화 10편을 프로듀서로서 함께 만들었다.


마지막 작품이 ‘지금은맞고그때는 틀리다’(2015). 홍 감독은 이 영화로 만난 배우 김민희와 스캔들, 부인과 이혼소송까지 휩싸였다. 김초희 감독은 영화사를 떠났고, 이후 프로듀서 일도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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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찍고 살 줄 알았는데….” “지 감독님 영화는 유일무이한 예술영화야. 막말로 찬실이 같은 PD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였다고.” 극 중 대사에서 당시 심정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영화를 계속해야 하나, 반찬가게라도 해야 하나.” 41살에 찾아온 혼란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배우 윤여정의 제안으로 그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경상도 억양 지도 일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이번 영화의 구상이 떠올랐다. “캐릭터에 직업적 이력이 묻어난 것은 맞지만, 나머지는 만든 것”이라 설명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그가 가장 인상적이라 꼽은 대사는 이것.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실직했을 때 다른 후회가 없더라고요, 시나리오도 일만 하고 산 저 자신한테 질문을 던지면서 썼어요.”


영화 제목도 수차례 바뀌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땐 ‘기다리는 마음’, 촬영하면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편집할 땐 ‘눈물이 안 나와’로 수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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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는 한 달 반 만에 썼어요. 이거 아니면 길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나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큰 줄기는 지금과 비슷한데 자기연민이 정말 심한, 객관화가 전혀 안 된 시나리오였죠.”


1년 정도 고치며 자신을 빼닮은 찬실을 “객관화하려 노력했”단다. 편집을 다 끝내고야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영화를 보며 “찬실이는 정말 복이 많네…”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삶의 힘든 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다, 싶었다. 찬실이를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해준 사람들이 보였다.



윤여정 "요즘 저런 아이 있을까"


“살면서 제가 흥했다, 망했다 한 적이 많거든요. 망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되게 많이 도와주면서 그 위기를 헤쳐 나왔더라고요. 그게 무의식 속에 각인돼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듀서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운 윤여정이 그런 이다. 그는 언론시사회 때 김 감독을 두고 “요즘에도 저런 아이가 있을까, 싶을 만큼 사람에게 감동받았다”며 “정말 고생하며 촬영했는데 상을 많이 받아 뿌듯하다”고 진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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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에 꿈꾼 감독, 23년 후 이뤄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순제작비 3억원이 채 안 되는 독립영화다. 초저예산에 맞춰 장편으론 빠듯한 18회차 만에 촬영을 마무리해야 했지만, 그저 기뻤다. 스물셋에 처음 꿈꾼 영화감독을 비로소 이뤄서다.


“영화는 절대 혼자 만들 수 없으니 나보다 잘 만들 사람들이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도와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전력을 다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감독보다 프로듀서 경력이 앞서며 멀리 둘러온 길이었다.



단편에선 전기밥솥·외계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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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편 연출은 꾸준히 했다. 프랑스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시절 만든 공포영화 ‘몽수리식 정원 살인사건’(2003)은 주인공이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에도 나온 몽수리 공원부터, 엘리베이터 없던 김 감독의 7층 자취방까지 도망치는 여정에 사운드와 계단이 주는 공포를 담았다.


전원사에 들어간 이후 찍은 ‘겨울의 피아니스트’(2011)는 홍상수식 연애담의 풍자버전, ‘우리순이’(2013)는 주인공이 전기밥통이었다. ‘산나물 처녀’는 평생의 짝을 찾아 지구에 온 외계인 처녀와 선남(仙男)의 사랑 이야기. 윤여정·정유미‧김의성‧안재홍‧예지원 등 홍상수 사단 배우가 자주 출연했다.



홍상수 감독 영향? "무의식 속에"


영화를 연출하며 홍 감독 영향도 있었을까. “무의식속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겠죠. 그분 영화 되게 열심히 만드시잖아요. 그런 부분요.”


빛날 찬(燦), 열매 실(實). 찬실은, 마흔 되도록 결실이 없었던 주인공이 뭔가 맺어봤으면, 소망하며 지은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 ‘초희’도 사연이 있다. “처음 초(初)에 기쁠 희(喜). 본명은 경희에요. 초희란 이름을 20년 전 법적으론 아니고 집에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죠. 저희 엄마가 사주를 봤는데 본명이 너무 평범하다고. 이름 바꾸고서 조금, 살림살이가 나아졌어요. 그전에는 경제적으로 진짜 어려웠거든요.”



나전칠기 장인 아버지…가족 뿔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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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인생 ‘맷집’이 두둑해진 게 어릴 적부터다. 아버지는 나전칠기 장인,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급 자개농 기술로 가구 공장을 열었다. 번창하던 사업은 수입가구가 자개농을 밀어내며 “쫄딱 망했”다. 부모님과 삼남매가 뿔뿔이 흩어졌다. 극 중 찬실처럼 “망하면 산동네로 이사 간다는 상투적인 느낌”을 안고 살았다.


입시 점수에 맞춰 대학 불문과에 가선 비디오가게 ‘알바’에 더 열중했다. “방황하던 시기, 온통 심각했던” 그를, 우연히 본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영화 ‘집시의 시간’이 사로잡았다. 그렇게 영화라는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새벽 3시까지 옷가게 등 하루 알바 3탕을 뛰어 파리1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에선 외국인 유학생도 국립대는 무료에 가까운 학비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정전' 속 장국영 추억하며


이번 영화엔 김 감독이 영화를 처음 좋아했던 시절의 초심을 드러내는 상징들도 나온다. 영화 ‘집시의 시간’은 비디오테이프, 한때 좋아했던 홍콩스타 장국영은 영화 ‘아비정전’의 그와 닮은 분장의 사내로 나온다. 뤼미에르 형제의 인류 최초 영화 ‘기차의 도착’(1895)을 재현한 듯한 엔딩신은 영화의 온 역사가 극 중 찬실을, 김 감독을 응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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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년 전까지만 해도 예술영화만 좋아했다”는 그는 첫 장편을 만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단다. “예전엔 취향을 벗어난 영화는 생각을 안 하고 싶었어요. 그런 한계나 편견에서 폭이 좀 넓어졌달까요.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고, 관객 입장에서 감동받아 여기까지 온 사람이 관객을 생각 안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찬실이가 쓰던 시나리오 실제로…


구상 중인 차기작이 독특하다. “지난 4~5년간 힘들었던 저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고 믿거든요.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고미숙(고전평론가)의 『동의보감』을 제일 열심히 읽었죠. 그 책을 토대로 여성들의 성에 대한 억압·트라우마에 관한 코미디를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또 다른 학원물도 있어요. 을지로 배경의 공포영화, 복합장르에요.”


영화 말미 찬실이 쓰고 있던 시나리오도 실제 그가 준비하던 것이다. 품어왔던 이야기들의 풍요로운 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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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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