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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에게 대들었다가…정도전,10년 귀양 살며 칼을 갈다

김준태의 자강불식

중앙일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 정도전(1342~1398). [중앙포토]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그는 자신의 손으로 새 왕조를 설계하고 임금을 세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장자방과 한 고조는 바로 자신과 태조 이성계를 빗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귀양을 갔다. 평탄함 속에서 혁명가는 나올 수 없는 것일까? 특히 그는 10년에 걸친 낭인 생활을 견뎌야 했다.


1375년(우왕 1년) 성균사예로 있던 정도전은 조정의 실권자 이인임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 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선왕 공민왕이 원나라의 간섭을 끊어내고 고려의 자주권을 확보한 큰 뜻을 무위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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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지는 해인 원나라와 손잡고 떠오르는 해인 명에 대항하겠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재상 경복흥의 면전에서 “원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저는 그의 머리를 베거나 아니면 포박하여 명나라로 압송할 것입니다.”라고 소리쳤다.


이 일로 정도전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처벌의 강도는 예상보다 무거웠는데 이인임이 그를 본보기로 삼아 반원세력의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도전은 나주에서 2년, 고향에서 4년간 귀양 생활을 했고, 1384년(우왕 10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복직되기 전까지 무려 10년이나 수도 개성의 출입이 금지됐다. 벼슬에 나아가 세상을 경륜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정말 암담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고단한 시기가 정도전을 성숙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형제보다 깊은 정을 나눴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뜬구름같이 흩어지는 것”을 본 배신감. “책을 읽는다며 가족의 생계를 나 몰라라 했을 뿐 아니라 처자식을 더 큰 고통으로 밀어 넣은” 미안함.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불의가 승리하는 세상에 대한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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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큰소리를 냈고, 시기가 불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바른말을 좋아하였으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있으면서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게 된 이유이리라.”


“물은 흘러 결국엔 바다에 이르고/ 구름은 떠서 언제나 산에 있건만/ 나 홀로 시들어 가며 나그네로 한 해 한 해 보내고 있네.” “이미 시대와 어그러져 세상을 버렸는데/ 또다시 무엇을 구하랴?”


이 시기에 지은 글들에는 좌절과 고독이 잔뜩 배어난다.


상황이 이쯤 되면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변절한다. 울분을 견디다 못해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희망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체념하기보다는 세상과 맞서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언제 올지 모를 “하늘이 정하는 그때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유학 경전에 대한 공부를 접어두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 같은 병법서를 읽은 것은 그래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정도전은 누군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기강이 엄격하고 정제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 불패의 명장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이성계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후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알려주는 바와 같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어떻게 보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가 좌우하는 법이다. 정도전은 10년의 방황을 혁명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었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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