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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아나운서, 재떨이 날아온뒤 사라졌다…그녀의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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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프롤로그] 미디어 아티스트 김일동 작가는 NFT(대체불가능토큰) 책 출간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로 ‘책 전문가’ 정용실 KBS 아나운서를 꼽았습니다. 교보문고 북모닝 CEO 책 선정위원으로 8년째 매월 추천 도서 3권을 선정하고, 트레바리 독서클럽도 이끌고 있죠. 서강대 언론홍보대학원 스피치 수업 겸임교수이자 지금까지 책 5권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김 작가는 지난 2016년 한 워크숍에서 정 아나운서가 집에도 못 갈 정도로 심하게 체하자 의사도 못 푼 체증(滯症)을 풀어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네요.

■ 웹툰 세계 1위 했던 미술계 이단아…NFT 전문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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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티스트 김일동 작가는 웹툰 ‘까뱅’(GGAVANG)으로 세계 1위까지 했지만 미술계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런 그가 NFT 전문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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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정용실 아나운서. 그는 출산 후 직장에서 '괘씸죄'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김현동 기자

정용실(54) 아나운서는 32년 차(KBS 18기) 방송인이다. 입사 2년 만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진행을 맡아 이금희(16기ㆍ6시 내 고향), 정은아(17기ㆍ아침마당) 아나운서와 ‘교양 3대 트리오’로 꼽혔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동기 프로듀서와 결혼한 그가 회사에 임신 소식을 알리자 재떨이가 날아왔다. ‘괘씸죄’로 고정 프로그램을 못 받고 퇴사를 고민할 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 아나운서는 “고민이 있으면 이상하게 책에서 답이 나오더라”라고 했다. 그를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만났다.

조수미 트로트에 재기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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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실 아나운서는 거실을 책장으로 꾸몄다. 김현동 기자

처음엔 기자를 꿈꿨는데 “엉뚱하게도” 아나운서가 됐다. 응시하는 언론사마다 족족 떨어졌고 9개월 ‘백수생활’ 끝에 “원서 접수 줄이 짧아 보여” 유일하게 아나운서 직군으로 응시한 KBS에서 최종 합격하면서다. 짧은 전성기 이후 출산의 대가는 가혹했다.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대부분 상처받은 사람의 이야기에요. 그게 위로가 돼요.” 5년간 책을 읽기만 하다가 그 후 5년은 와 닿는 문장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를 마흔을 앞두고 첫 책 『서른, 행복하게 사는 법』으로 냈다. 그는 “직장에서 겪은 어려움이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라고 했다.


사내에서 일회성 출연으로만 떠돌던 그가 다시 돋보인 건 1995년 광복 50주년 행사 중계였다. 그의 요청으로 소프라노 조수미가 방송에서 처음으로 트로트를 불렀고,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사내에선 “방송 잘하는 애를 썩히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덕분에 ‘TV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프로그램 리포터로 재기해 시청률을 5%에서 15%로 올리고 5년 넘게 장수 리포터로 기록을 남겼다. 결국 신입 때 잘렸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MC로 복귀했고, 약 5년간 자리를 지켰다.

“방송 생명 끝” 만류에도 뉴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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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실 아나운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꺼내들었다.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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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실 아나운서는 책을 읽을 때마다 진한 흔적을 남긴다. 김현동 기자

그러다 두 번째 위기가 왔다. 장수 진행자 교체를 통보받았다. 잘 나가던 아나운서들은 프리로 나갔다. 그 역시 스카우트 제의에 잠시 이직을 고민했지만,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시사 프로그램을 맡아 마음을 다잡았다. 기회는 다시 왔다. 6개월 만에 TV 시사교양 프로그램 ‘주부, 세상을 말하자’를 맡았다. 여성작가의 책들은 주부들의 마음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그가 기획한 최성애 교수와 함께 한 ‘부부 클리닉’ 코너가 인기를 끌었다. 방송에서 보기 드문 여성 단독 MC로, 한국아나운서대상 등을 받았다. ‘KBS 스페셜’ 등 다큐 내레이터로도 본격 활동했다.


2009년 세 번째 경력 단절은 자발적이었다. “엄만 항상 바쁘잖아.” 중학생 아들의 이 말에 “이번에 나가면 방송 생명 끝난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3년 임기 뉴욕 특파원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나섰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두 번째 책 『도시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냈고, TV ‘즐거운 책 읽기’ 진행을 맡았다. 출산 후 그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룬 방송도, 귀국 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책 덕분에 가능했던 셈이다.

“인간 이어령 보고 싶었다”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됐다. 인터뷰이들이 정 아나운서 앞에선 다른 곳에선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게 되는 비결이다.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 전 장관은 딸에 대한 속내를 그가 진행한 ‘한국한국인’ 방송에서 처음 털어놨다. “대본대로 안될 수도 있다”는 그의 ‘도발’에 이 전 장관이 “대본대로 하는 거 질색”이라고 답해준 덕에 즉석에서 이뤄진 대담이었다. 이후 사흘간 울었다는 그는 “지성인이 아닌 인간 이어령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발레리나 강수진도 긴 무명 시절 반지하방에서 견뎠던 과거를 그 앞에서 처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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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의 원칙은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다. 김현동 기자

그에겐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는 원칙이 있다. 현재 라디오 ‘뉴스브런치’와 ‘뉴부심’(뉴스 브런치 부설 심리 연구소)을 진행하는 것도, 상담을 청하는 수많은 멘티를 일일이 만나는 것도 그래서다. 지난 2007년 여성가족부 멘토링으로 만난 멘티를 비롯해 30여명의 멘티는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2030 세대는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 자기감정을 잘 알아요. 그게 오히려 희망적이죠. 사회를 향한 그들의 분노를 어떻게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그게 제 고민이에요.” 그래서 다시 책을 읽고 있다. 주로 마음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청년들과 책 이야기를 한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선택한 ‘책으로의 도피’가 저만의 생존법이죠.”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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