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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판 돈 1000억 부었는데···존폐위기 민사고의 눈물

평준화에 밀려 진짜 ‘지구상에 없는 학교’ 될까?


2019년 자사고 재지정 못 받으면 일반고 전환하거나 문 닫을 수도


파스퇴르유업 성공으로 번 돈 교육에 투자…기업은 가고 학교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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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평준화는 1974년 도입됐다. 사립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국가가 가져간 것이다. 이후 소위 ‘명문고’는 사라졌다. 수월성 교육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자율형사립고(이하 자사고)였다. 김영삼 정부 때 발의돼 김대중 정부에서 도입됐다.


최명재(92)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1996년 설립한 민족사관고(民族史觀高)는 상산고, 해운대고, 울산현대청운고, 포항제철고, 광양제철고와 함께 자사고의 전신인 6개 자립형사립고 시범학교에 포함됐다. 민사고는 한국적 토양에서 ‘진짜 사립학교’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이튼스쿨,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초트 로즈마리 홀 고교 같은 세계적 사립학교를 지향한 것이다. 그는 이 학교에 민족주체성교육, 영재교육, 지도자 양성이란 이상을 담으려 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의 고교체제 개편을 통해 자사고 수가 늘어났다. 전국단위 학생모집 자사고(10개)와 광역단위 학생모집 자사고(36개)를 포함해 최대 46개에 달했다.


그러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교육정책의 기조가 크게 바뀌었다. 과학고와 영재고만 제외하고 자사고와 외국어고, 국제고를 ‘일반화’하겠다는 방향성이다. 이에 대해 국가지원이 많이 들어가는 공립이 대부분인 외고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실정이다. 정부는 굳이 ‘자사고 폐지’란 용어만 쓰지 않을 뿐,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자사고의 숨통을 조일 정책적 수단은 몇 가지가 있다.







존폐 기로에 처한 민사고


우선은 재지정 평가기준을 까다롭게 조정하는 것이다. 실제 각 시·도 교육청은 재지정 기준 점수를 종전 60점에서 70~80점까지 올렸다. 재지정 평가기준에서 사회통합전형(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나 차상위계층 자녀 등 사회적 배려 대상의 입학)을 최대 14% 비중으로 뒀다. 청와대~교육부~시·도 교육청까지 교육관이 일치할 때 시행될 수 있는 조치다. 실제 2018년 6월 치러진 전국 17개 교육감 선거에서 대구·경북·대전을 제외한 14개 지역은 진보 혹은 중도 성향 인사가 당선됐다. 정부 의중이 거의 스며들 수 있는 구조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뒤집어 말하면 보수 성향 교육감들은 청와대, 교육부 노선을 따르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강원도 교육감은 진보나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강원도교육청은 지역 자사고인 민사고의 사회통합전형 비중을 4%로 낮췄다. 자사고를 줄여나가겠다는 정부의 정책기조와 사뭇 다른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밖에 정부는 자사고의 학생 선발시기를 늦춰 일반고와 같이 뽑게 하고, 집필고사 없이 입학시험을 면접으로만 제한하는 정책도 시행 중이다. 학생 선발시기 변경에 관해 민사고·상산고·울산현대청운고 등 전국단위 자사고들은 헌법소원을 신청해놓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자사고의 재지정 평가는 5년 단위로 이뤄진다. 횡성에 위치한 민사고는 2019년 5월, 강원도교육청의 재지정 평가를 받을 예정이다. 이 평가에서 합격점을 얻지 못한다면 민사고는 최악의 경우, 문을 닫을 수도 있다. 한만위 부교장은 “민사고는 돌아갈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일반고에서 전환된 학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넓게는 자사고겠지만 좁게는 민사고를 놓고, 극과 극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대입보다 고입을 더 전쟁으로 만든 학교”(김은정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원)와 “세계 명문 20대 고교에 포함된 나라의 자랑”(윤정일 전 서울대 사범대학장)으로 확연히 갈린다.


자사고 중 민사고를 조명하는 이유는 이 학교의 독특한 스토리와 지향성 때문이다. 그 궤적을 안 다음에야, 민사고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을 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돈을 벌었다”


최명재 설립자는 사재를 포함해 이 학교에 1000억원을 쏟아부었다. 어느덧 부와 권세는 사라졌고, 이 학교만이 남아있다. 삶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는 건강 상태로 알려졌다. 세상이 그를 잊어가는 와중에 설립 4반세기를 맞이하는 민사고는 불확실성 속으로 달려가는 양상이다. 1996년 개교 이래 전례 없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평생의 공력을 들여서 쌓아올린 탑이 존폐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최 설립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염려로 인터뷰는 어려웠다. 그 대신 아들인 최경종 민사고 행정실장과 학교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의 분신 민사고처럼 최명재의 일생 역시 영광과 오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92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최명재는 1946년 상경했다. 1953년부터 은행원으로 7년을 일했다. 그러다 1960년 돌연 택시운전사로 전업했다. 그는 4남2녀의 장남이었다. 6형제의 내외와 그 자식들까지 한집에 살았다.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최명재가 택시사업에 투신한 것으로만 여겼다. 최 실장의 기억이다. “김제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제 때 만든 것이었다. 가족여행을 갔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들르더니 초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고 사셨던 것 같다.” 택시로 번 수입의 일부를 최명재는 따로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최 실장은 “어렸을 적 나에겐 아버지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중학교 때부턴 집에 발길을 거의 끊었다. 최 실장은 “당시 아버지한테 의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 심정이 그대로 이어져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로 살기로 마음먹게 됐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1988년 잠시 아버지 회사인 파스퇴르유업에서 일했다. 그러나 채 한 달도 못 돼 아버지와 충돌하고 나왔다. 그리고 10년 이상을 떨어져 살았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버지가 먼저 실천하고 있었다.” 민사고 설립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한복 입고 영어 쓰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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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재는 1974년 우연한 기회로 이란에 진출했다. 운송업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자 해외 물류운송 사업에 인생을 걸었다. 꽤 큰돈을 벌었고 이란에서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나기에 앞서 빠져나왔다. 시운이 따랐다. 거듭된 성공은 최명재에게 자기 확신을 줬다. 한국에 돌아온 뒤, 목장사업으로 또 업종 변경을 감행했다.


2004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 [20년 후 너희들이 말하라]에서 최명재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은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다. 교육사업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순간 ‘사업’만 남고 ‘교육’은 실종된다. … 영국 이튼스쿨 같은 학교를 설립하려면, 학교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가 돈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재단이 튼튼해야 한다. 재단이 튼튼하려면 깨끗하고 수익성 좋은 기업, 기왕이면 공익성 짙은 기업이 뒷받침해야만 한다. 내가 그런 기업을 일으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사업을 찾다가 마침내 나는 목장을 생각해 냈다.”


강원도 횡성 성진목장이 그렇게 생겨났다. 그리고 1981년 일본에 건너간 최명재는 ‘저온살균우유’와 만난다. 6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최명재는 1987년 파스퇴르유업을 세웠다. 그해 9월 7일 파스퇴르우유가 첫선을 보였다. 파스퇴르우유는 초고온 순간살균우유를 만들던 기존 유가공업체들과 소위 ‘우유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파스퇴르우유의 인지도를 높였다. 출시 1년 만에 매출액이 10배 증가하는 등, 상승을 거듭했다.


우유사업이 궤도에 진입하자 최명재는 “나는 장사꾼이다. 기왕 장사를 시작한 바에는 큰 장사를 하려고 한다”고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한다. 영재교육과 민족교육을 병행해 지도자를 양성하는 ‘지구상에 없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 “내가 돈을 벌었다면 그것은 사회가 잠시 내게 돈을 맡겨 제대로 쓰도록 기회를 허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 돈을 위탁받은 나는 가장 적절한 용처에 효율적으로 그 돈을 써야 할 의무를 진다”고 썼다.


1992년 명재학사를 2년간 운영한 뒤, 1995년 10월 민족사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최경종 실장은 “아버지의 저돌성은 폭주기관차 같았다. 사람들은 힘겨워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스퇴르유업과 민사고는 흔적이 남을 만한 업적을 냈다”고 평했다.


최관영 부교장은 1995년 12월 교사 모집공고를 통해 민사고로 와서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당시 신내동에 있던 파스퇴르유업 서울사무소에서 면접을 봤다. 당시 국·영·수 교사는 일반 국공립학교의 3배, 나머지 과목은 2배의 보수를 줬다. 조건도 좋았지만 그때 내 나이가 28세였다. 새로운 학교의 모습이 궁금했다.” 민사고는 선생님들에게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사본까지 제출하도록 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었더니 “뛰어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은 어릴 때부터 생각과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석사 이상 학력의 선생님만 뽑았다.


초창기 민사고는 횡성 파스퇴르 본사 공장 2층 실험실 옆을 교무실로 쓰고 있었다. 1996년 1월 3일에서야 지금의 민사고 건물이 완성됐다.


민사고는 1996년 3월 1일 개교했다. “3·1운동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없다”는 최명재의 ‘고집’ 때문이었다.


초창기 민사고는 학생보다 교사가 더 힘겨워했다. 한 반에서 50명을 가르치다가 1~5명을 개별화 교육하려니 오히려 외국인 교사가 적응을 더 잘했다. 소수의 학생(첫해 전교생 30명), 다수의 선생님, 최첨단 기자재가 갖춰졌다. 실물화상기, 전자칠판이 들어섰고, 학생 전원에게 펜티엄급 컴퓨터를 제공했다.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와 식비도 무료였다.


학교 건물은 한옥의 형태로 지었다. 한복을 교복으로 입혔다. 전통 사모(모자)도 쓰도록 했다. 영어와 수학, 과학 수업은 영어로 했다. 처음엔 교사들이 힘들어하자 해외로 보내 교육시켰다. 전문 강사를 데려와 야간에 교사들에게 영어 수업을 했다. 지금은 영어 상용이 강제에서 권장으로 바뀌었다. 체벌도 있었다. 초기에는 설립자 최명재가 회초리로 직접 체벌을 가했다. 2003년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이 이 학교 교장에 부임한 뒤, 체벌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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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민사고의 가장 큰 갈등은 최명재와 교사·학부모 사이의 교육에 대한 견해차에서 발생했다. 최관영 부교장의 증언이다. “설립자께서 한번은 ‘당신을 왜 뽑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일반 학교의 때가 덜 묻어서 뽑았다’고 하더라.” 최명재는 아이들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선 선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일부 현장 교사들은 교권을 침해당한다고 반발했다. 학부모와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최명재는 서울대 진학을 위해 민사고의 교육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명재의 직설적 화법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1년 만에 학생 30명 중 19명이 떠났다. 교사 28명 중 20명이 물갈이됐다.


최명재는 ‘독불장군’이었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교정하는 성격이었다. 초창기 민사고는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수업이었다. 일요일도 쉬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 종교 활동, 2주에 하루 집에 가는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방학도 10일뿐이었다. 그러나 재충전, 사색, 탐구의 시간이 있어야 진짜 영재교육이라고 생각을 전환하자 프로그램이 수정됐다. 최 부교장은 “지금도 민사고는 국영수와 수능문제풀이형 교육 등 입시위주 교육 비율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가 한국을 덮쳤다. 민사고의 젖줄인 파스퇴르유업은 1998년 1월에 부도를 냈다. 고품질 고가 유제품에 치중해 왔는데 고객의 구매력이 떨어지자 매출이 급락했다. 수입 원료가격은 상승했다. 금융 쪽이 무너지니 자금 조달도 어려웠다.


최명재는 부도의 모든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해 5월 금융채권단의 요청으로 복귀했다. ‘민사고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는 것이 유일한 복귀 조건이었다. 이후 1998년 10월 한시적으로 채무 변제가 동결되는 화의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민사고는 2000년 11층짜리 기숙사를 완공했다. 최명재는 이 건물 10층에 입주해 학생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파스퇴르유업은 2004년 한국야쿠르트에 매각됐다. 이후 2010년 롯데푸드에 다시 팔려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파스퇴르유업의 부도에 관해 민사고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크게 두 가지 시선이 존재했다. 하나는 “회사보다 학교에 쏟는 시간이 더 많았다. 1000억원의 돈을 민사고에 투자하지 않고 파스퇴르우유를 홍보했으면 매출이 달라졌을 것”이란 관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민사고와 무관하게 파스퇴르유업은 시스템에 한계가 있었다”는 시각이다. 오너의 의중이 절대적이다 보니 효율적이었지만 한번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걷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공을 거듭한 최명재의 자신감은 타인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명재는 회고록에서 “현대, 삼성 출신 CEO를 데려왔지만 잘 안 됐다”고 토로했다. 파스퇴르유업은 시스템 경영이 아닌 1인 기업이었던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요인으로 민사고는 탄생할 수 있었다. 이사회 의결 같은 절차가 있었다면 이런 ‘무모한’ 투자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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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최명재는 생과 사의 경계에 섰다. 휴가 차 내려간 제주도에서 화상을 입은 것이다. 호텔 사우나의 온도조절 장치가 고장 나는 바람에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모른 채, 평소처럼 풍덩 뛰어든 최명재는 전신 85% 화상을 입었다. 이는 사망 확률이 85%란 뜻이었다.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패혈증이 왔다. 최 실장은 “꿈에서 누군가가 아버지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싫다’고 외쳤다더라. 아버지는 일정 기간 혼수상태로 있었다”고 떠올렸다.


최명재는 겨울까지 입원해 있었다.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오자 최 실장에게 “학교에서의 일들을 보고하라”고 병상에서 지시했다. 그 겨울 퇴원하자마자 최명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민사고였다. 최 실장의 기억이다.


“오자마자 수업 참관을 직접 하겠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그때 몸 상태론 힘들었다. 화상 치료를 위해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다. 입원 기간 아버지의 온몸 근육은 위축됐고, 관절도 굳은 상태였다. 파스퇴르유업 장정 셋이 아버지를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휠체어에 앉혔다. 그러고 교정과 교사를 돌며 수업을 참관했다. 끝난 뒤 아버지를 다시 차에 태워 학교 기숙사까지 모시고 가야 했는데 아버지는 몸을 굽히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 추운 겨울에 아버지가 몸을 움직여 보려고 땀을 뻘뻘 흘렸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아버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 최명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날의 장면을 본 뒤 교육자 최명재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하고, 존경하게 됐다.


최명재는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 있었다. “나는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안 한다.” 그래서 아들은 민사고도 처음엔 파스퇴르유업을 위한 마케팅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민사고를 위해 판을 매우 크게 벌려놨다. 학교에선 뭐든지 최고급이었다. 초창기엔 전액 무료로 학생들을 받았다. 민사고를 갖고 국가장래를 논하는 대단한 장사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화상을 당한 뒤에도 학교에 와서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니,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더라도 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졌다. 자식인 나부터 의심했지만 아버지의 진심을 알겠더라. 아버지는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이루기 위해 민사고를 운영한 것이었다.” 이후 최 실장은 아버지에게 “(내가 잘할 테니) 다시는 학교로 내려오지 말고 치유에 전념하시라”고 당부했다.


‘고집불통’ 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자식의 말을 들었다. 당시 몸은 성치 않았지만 최명재의 정신은 또렷했다. 기숙사 10층에 있으면서 재활치료를 받고 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여전히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


민사고는 2004년 파스퇴르유업에서 완전 분리됐다. 전액 무상이었던 민사고는 화의 기간 기숙사 비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 5월부터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2004년까진 파스퇴르유업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유업과 결별한 뒤, 완전히 홀로 서야 할 상황에 처했다. 등록금까지 받게 됐다. 당시 대기업 인수설도 돌았지만 민사고는 최종적으로 자립 운영의 길을 갔다.


이 무렵 최명재는 기숙사를 떠나 서울로 옮겼다. 화상 후유증에 노환이 겹치니 인근에 병원이 있는 서울로 가야만 했다. 그래도 최명재는 틈만 나면 학교를 찾아와 챙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력은 떨어졌다. 민사고는 ‘포스트 최명재 시대’를 서서히 준비해 갔다.


민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최명재의 마지막 모습은 2016년 2월 열린 개교 20주년 기념행사였다. 휠체어를 타고 교직원과 학생들 앞에 섰다. 그저 지켜보다가 오래 있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공식석상에 최명재 설립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최명재가 없어도 민사고는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는 민사고가 아니라 정치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영역일 것이다. 교육정책은 아주 정치적인 영역이다. 다양성과 평등이란 상반된 가치 중 한 쪽을 선택해 무게중심을 둬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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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위 부교장은 “정치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민사고를 편 들어주면 표가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민사고 교장 출신인 윤정일 전 서울대 사범대학장은 한국교육개발원에서도 일했다. 그는 “일본과 동남아에서도 사립학교를 지을 때 민사고를 보러 온다”고 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교의 모임인 ‘G20 하이스쿨’에 민사고가 정식멤버로 들어갔다. 나라의 자랑인데 배 아프다고 이러면 안 된다. 민사고 같은 학교가 없어지면 강남 중학생들은 (일반고 진학이 아니라) 유학을 갈 것이다.” 윤 교수는 “사립은 자율권이 핵심”이라고 했다. (어차피 자사고에 대해 국가지원도 없는데) 잘되는 학교는 그냥 두면 된다는 그게 그의 지론이다.


반면 김은정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원은 이에 정색을 한다. 그는 “고등학생보다 중학생의 1인당 사교육비가 높다”며 다음과 같은 현실에 주목했다. “서울시만 해도 일반고가 204개인데 자사고는 23개다. 최소한 광역단위 자사고에 우리 아이는 보내야 한다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영재학교, 전국단위 자사고, 과학고, 외고, 광역단위 자사고 그리고 일반고 순으로 고교 서열화가 이뤄진다는 것. 김 연구원은 “광역단위 자사고 등록금만 해도 일반고의 3배 안팎”이라며 “전국단위는 더욱 높아질 수 있고 공부를 잘해도 돈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교육 불평등을 고착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명재 설립자는 민사고의 존재 이유에 관해 “20년 후 너희들(졸업생들)이 말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개교 이후 20년이 아니라 한참은 더 시간이 흘러야 온당한 평가에 접근할 듯하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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