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 안 써” 보청기 끼고 단역, 65년차 배우
연극 ‘레미제라블’ 84세 오현경
“이젠 너무 큰 배역 줘도 힘들어”
출연배우 전부 모아 연기법 강의
“얼굴로만 연기하려 하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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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세의 배우 오현경이 다음 달 7~16일 연극 ‘레미제라블’(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작고 투명한 보청기를 양쪽에 낀 채 연습 중인 그를 28일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상대 배역을 맡은 젊은 배우가 셋인데, 셋이 다 스타일이 달라. 거기에 맞춰서 나도 다 다르게 연기해야 돼.” 2년 전 손숙과 함께 연기할 땐 보청기를 빼놓고 무대에 올랐다. 귀가 안 들려도 그는 본능적으로 연기한다. 후배 연기자들이 ‘교과서이자 정석’이라 부르는 그 연기다.
‘레미제라블’에서 오현경이 맡은 역할은 질 노르망. 부르주아 청년인 마리우스의 할아버지다. 2막의 두 장면에 나온다. 손자와 언쟁하는 장면, 그리고 손자가 민중 봉기에 참여하기 직전 만나는 장면이다. 1955년 데뷔, 경력 65년인 원로 배우는 단역을 자처했다. 2011년 ‘레미제라블’에서도 이 역할이었고, 2012, 2013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이제는 너무 큰 배역을 줘도 힘들어. 총명기가 다 빠져서.” 역할은 작지만, 존재감은 묵직하다. 오현경은 ‘레미제라블’ 출연 배우를 전부 모아 연기법 세미나를 열었다. 연습할 때 조언도 잊지 않는다.
오현경은 연극배우 중에서도 정확한 발음, 튼튼한 발성, 선명한 감정 표현으로 이름이 높다. 오현경의 화법과 연기술을 연구한 석사 학위 논문도 2010년 나왔다. “배우 화술의 기초는 발성, 발음, 끊어 읽기다. 기본적인 훈련이 돼 있어야 하는데, 인물 좋고(얼굴 잘 생기고) 힘 좋다고 연기하려 하면 안 된다.”
1987년부터 6년 동안 방송된 드라마 ‘TV 손자병법’의 이장수 과장 역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지만, 오현경이 꿈꾼 것은 오로지 연극 무대였다. 서울고 3학년 때 출전한 ‘전국 고교생 연극경연대회’ 무대로 데뷔해 연극을 하려 국문과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엔 연극 11편을 했다.
그는 “긴 대사를 한 호흡에 하는 것처럼 쫙 해야 듣는 사람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며 “연극 무대에 올라 있으면 저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나와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부심이 든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국립극단 단장 이성열한테 전화해서 ‘왜 나 안 써. 큰 역할은 줘도 못 하니까 단역 하나 줘’ 했다. 이 단장이 ‘에이’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만나서 물어볼 참이야. 역할 줄 건지 안 줄 건지.” ‘레미제라블’ 이후에도 그의 무대 욕심은 그대로다.
“어릴 때 거리에서 가설무대 연극이 많았어. 그때 무대 아래에서 턱 고이고 사람들 하는 거 보면 너무 재미있는 거야. 연극을 해야겠다 마음먹었지. 공부는 흥미 없고 오로지 연극이었어. 지금도 무대에 오르면 그 기분이야. 연극배우는 청중이 300명이든 500명이든 똑같이 듣도록 발성해야 해.” 주연·단역을 떠나 무대의 본질을 사랑하는 노배우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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