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돕던 부티지지, 12년뒤 아이오와서 '백인 오바마' 돌풍
美 대선 민주당 첫 경선 아이오와 코커스
중간 개표 결과 부티지지 1위
인구 10만 도시 시장이 정치 경력 전부
중산층, 중도 성향 지지…기성 정치 염증
청년 세대 '학자금 탕감' 최고령 샌더스 지지
08년 오바마 아이오와 돌풍 때 자원봉사
남성 파트너와 결혼…신세대 정치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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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을 위한 첫 경선을 치른 민주당의 선택은 정치 경력이 가장 짧은 피트 부티지지(38)였다.
정치 경력이라고는 미국 중부 인디애나주의 작은 도시 사우스 벤드(South Bend) 시장이 전부인 그는 전국 무대에서는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다.
경쟁자인 조 바이든(78)은 상원의원 36년과 부통령 8년을 지냈고, 버니 샌더스(79)는 하원의원 16년을 역임한 뒤 상원의원 13년째다. 엘리자베스 워런(71)은 상원의원 8년 차, 에이미 클로버샤는 14년 차 상원의원이다.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민주당이 신선한 얼굴을 택한 것은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민주당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기이자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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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지지는 스물아홉이던 2012년 인구 10만 명 소도시 사우스벤드 시장에 당선됐고, 2015년 재선했다. 올해 8년 차에 접어드는, 신인급 정치인이다. 사우스 벤드는 인구 규모로는 충남 보령시와 경남 밀양시 중간쯤 된다.
지난해 4월 출마 선언을 할 때만 해도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미국 내 인구 10만 명 이상 도시 중 최연소 시장’ 정도였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미국인이 많다. 트럼프는 자신의 대선 유세에서 종종 부티지지(Buttigieg)를 어떻게 읽는지 가르쳐주며 그가 무명이라는 점을 조롱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츠 한 짝할 때 부트(Boot)에 빌딩 모서리를 가리키는 엣지(edge)를 두 번 반복하면 된다. Boot-edge-edge.”
부티지지는 전국 지지율에서는 줄곧 4위권에 머물렀다. 다만, 아이오와에서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 하반기 아이오와 여론조사 1위를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3일 코커스가 임박해서는 이곳에서도 3~4위권으로 밀렸다. 최근 한 달 동안 발표된 여론조사는 샌더스와 바이든이 선두 다툼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코커스 참가자들은 부티지지를 가장 선호했다. 현재 개표율이 62%이어서 최종 개표 결과가 나오면 샌더스와 선두가 뒤바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가 선전한 것만은 틀림없다. 부티지지 돌풍의 배후는 뭘까. 누가 그를 지지하고, 무엇이 그를 가장 주목할 만한 후보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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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대선 후보인 부티지지를 지지하는 세력은 뜻밖에도 청년 세대가 아닌 중장년 중산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포스트는 코커스 시작 전 이뤄진 입구 조사를 인용해 45~64세 코커스 참가자 4명 중 1명(26%)은 부티지지를 최종 선택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워런(19%), 바이든(18%), 클로버샤(17%) 순이었다. 이들 중장년 세대는 전체 코커스 참가자의 28%로, 가장 많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부티지지 표는 아이오와 주도인 디모인시 교외 주택가에서 쏟아져 나왔다. 백인 중산층 거주지를 일컫는 서버브(suburb) 지역인데, 전문가들은 이곳을 올해 미국 대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집단으로 꼽는다.
중도를 지향하는 부티지지의 정치적 입장이 교외 주택가에 거주하는 중산층과 잘 맞아 떨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부티지지는 다른 민주당 후보들과 달리 군과 국방력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정치·사회 통합의 가치를 얘기했다. 청년 세대보다는 기성세대가 관심 갖는 가치들이다.
샌더스와 워런이 진보 색채가 강한 공약을 내놓았다면, 부티지지는 미국 정치가 되찾아야 하는 가치와 미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런 점이 민주당 내 중도ㆍ온건 성향 유권자를 움직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입구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코커스 참가자의 38%는 샌더스와 워런이 공약한 전 국민 의료보험에 반대한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수(33%)가 부티지지를 뽑았다.
코커스 참가자 가운데 ‘트럼프를 이길 사람’이 민주당 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61%였다. 이들 중 가장 많은 24%가 부티지지를 선택했다. 부티지지 카드로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졸 이상 학력자들이 가장 많이(23%) 선택한 후보도 부티지지다.
그런 의미에서 부티지지는 올해 78세인 바이든의 대체재로 꼽혀왔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바이든’으로 불렸다. 바이든은 중도 성향과 풍부한 경험이 강점으로 꼽혔지만,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부패 논란이 일었고 기성 정치인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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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7~29세 청년 세대는 역설적으로 최고령 후보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이들 두 명 중 한 명(48%)꼴로 샌더스를 밀었다. 대학 무상 교육, 학자금 대출 탕감, 전 국민 의료보험 같은 공약에 열광했다. 샌더스 다음으로 부티지지(19%), 워런(12%) 순으로 지지했다.
중부 지역인 인디애나주에서 나고 자란 부티지지 성장 배경도 아이오와 사람들에게 통했다. 부티지지 아버지는 유럽 소국 몰타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사우스 벤드에 있는 노틀담대에서 29년간 교수를 지냈다. 어머니 쪽은 대대로 인디애나주에서 산 토박이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을 때 자원봉사자로 선거 운동을 도왔다. 그는 유세에서 "당시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운 버락 오바마를 소개하는 광고 전단을 들고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표를 호소했다"면서 "그때의 청년이 그 신화를 다시 재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오바마 대통령과 연결지으며 '백인 오바마' 전략을 썼다.
부티지지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유학했다. 2007~2010년 맥킨지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해군 정보장교와 해군 예비군을 거쳤으며,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훈장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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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게이로 커밍아웃했고, 2018년 교사인 남성 파트너 체이슨 글레즈만과 결혼했다. 성소수자 후보가 아이오와 코커스 1위에 오르면서 미국 정치에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을 쐈다.
지난 2000년 이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아이오와 코커스 1위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2000년 앨 고어, 2004년 존 케리, 2008년 버락 오바마, 2012년 오바마(현직 대통령),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모두 아이오와에서 1등을 먹고 당 대선 후보가 됐다.
부티지지도 그들처럼 대선 가도를 시원하게 달릴 수 있을까. 현재 가장 큰 숙제는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흑인들의 지지가 약하다는 점이다.
인구의 90%가 백인인 아이오와주에서 흑인인 오바마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뒤 흑인 비율이 높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에서 쐐기를 박은 것과 부티지지가 자신의 '앞마당'에서 선두에 오른 건 다를 수 있다.
부티지지 태풍이 세를 키워 미국 정치판을 휘저어 놓을지, 찻잔 속 태풍일지는 뉴햄프셔(2월 11일), 네바다(22일), 사우스캐롤라이나(29일) 등 다음 경선 일정을 거치며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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