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넴에겐 있고 '쇼미8'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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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3)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뮤지션이 누구인 줄 아시는지? 지금 할 얘기와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 주인공은 ‘오페라의 유령’, ‘캣츠’ 등의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그의 뒤를 잇는 부자는 폴 매카트니다. 매카트니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의미를 지닌 밴드의 멤버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1조원 이상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3위는 누굴까. 역시 1조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은 그래미상에 77번 후보로 올랐고 무려 22번이나 수상했으며 1억만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 치운 음반산업의 괴물이다. 그의 이름은 제이지. 그의 이름 앞에 붙던 수식어는 이제 ‘브루클린에서 코카인을 팔던 꼬맹이’에서 ‘포츈지에 이름을 싣는 부자’로 바뀌었다.
전 세계에서 돈이 많은 뮤지션 3위에 오른 제이지. 1억만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 치우며 음반산업의 괴물로 불리는 그의 재산은 1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영화 페이드 투 블랙 스틸] |
제이지의 성공에는 ‘엔터산업이 정말 크다’라는 것 외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1, 2위와 그가 가진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뮤지컬 작곡가라는 직업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웨버는 탄탄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명 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공부했던 왕립음악대학 출신이다. 매카트니도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누렸다. 그는 트럼펫과 피아노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악기를 선물 받는 등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제이지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다르다. 그에게는 착실하게 정규교육을 수료할 여유도, 악기를 선물해줄 아버지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붐박스’를 사다 줬다고는 하나, 제이지는 돈을 벌기 위해 길에서 코카인을 팔아야 했다. 그래서 그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입증한다. 빈민가 출신도 전용기를 소유한 슈퍼스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모두 출발점은 다르지만, 재능과 노력과 운에 따라 역전 가능하기도 한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여기까지는 좋다. ‘흙수저 비관론’이 제이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조금이라도 희망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힙합이 오로지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데 있다.(이제 오늘의 진짜 주제 나온다.) 요새 방영 중인 '쇼미더머니 8(이하 '쇼미')'를 보라. 가사는 온데간데없고 플렉싱(자랑질)만 남았다. 랩이 예술이려면, 래퍼가 딴따라가 아니려면 그들이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쇼미'를 만드는 엠넷은 매년 '마마'라고 불리는 음악상을 주최한다. 상을 받아가는 것은 대개 BTS나 트와이스 같은 아이돌이다. 다만 시상식 현장에서는 아이돌 못지않게 뜨거운 주목을 받는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쇼미 출신들의 래퍼들이다. 그들이 떴다 하면 관객석에 앉은 아이돌 그룹들조차 물개 박수를 친다. 그들도 래퍼들의 ‘스웩(멋)’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멋은 어디에서 오나. 자본과 시스템을 갖춘 대형기획사에 기대지 않는 독립성, 남이 만든 노래를 받는 대신 직접 비트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예술성에서 올 것이다. 그런데 쇼미에 등장하는 래퍼들은 과연 어떤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인터뷰에서조차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해대는 그들은 과연 랩이 언어를 이용한 예술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일까.
'쇼미더머니'에 등장하는 래퍼들은 과연 어떤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진 엠넷] |
『문학이란 무엇인가(문학사상사, 1992)』의 저자 김대행은 문학이란 결국 말을 가지고 놀이를 시작한 데서 왔다고 말한다. '리리릿자로 끝나는 말은'이나 ‘골라 골라 마음대로 골라’와 같은 장사꾼들의 노래, 혹은 학창시절 달달 외웠던 ‘태정태세 문단세’까지, 문학에는 형식이 있고 그 형식이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랩도 마찬가지다. 압운(押韻)을 중심으로 한 랩의 형식성은 래퍼가 얼마나 재치 있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압운들이 재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그것들에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많은 래퍼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듯하다.
적당히 벌고서 난 떠날래
너무 많은 욕심들 I make it stay far away
전부 다 날려 버리자고 머리에 stress
맘 편히 살자 토니 스타크 브루스 웨인
-도넛맨, 펀치넬로 '편해' 부분
'쇼미'의 최근 에피소드에서 공개된 노래의 가사 일부다. 너무 끙끙대지 말고 편하게 즐기며 살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래퍼는 ‘떠날래’와 ‘far away’같이 발음상의 규칙성을 통해 곡에 재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사의 내용이 어딘가 이상하다. 비록 만화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일지언정, 토니 스타크와 브루스 웨인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부호의 대명사 아닌가. ‘적당히’ 벌고 나서 즐기겠다는 사람이 어째서 이런 대부호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은 같은 곡의 후렴구에도 등장한다.
고생하지 말고 우리 대충 살자
맨날 놀러다니면서 지폐 만 장
-같은 곡 부분
맨날 놀러 다니는데 어떻게 지폐를 만장씩 가지고 다니는 것일까. 이건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를 주구장창 외쳐오던 최근의 랩 가사들보다도 질이 더 나쁘다. 열심히도 안 하는데 돈은 많기를 바라는 허황된 마음에는 어떤 식으로 공감하면 좋은가. 이처럼 고민이 결여된 가사의 특징은 그 메시지가 명료하게 요약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편해'의 경우 ‘차라리 적게 벌고 마음 편하자’인지, ‘많이 벌고 많이 쓰자’인지, 핵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세태가 안타까운 힙합 팬으로써, 감히 한 마디 조언을 해도 될까.
소설 쓰는 사람들은 소설을 잘 쓰는 팁 중 하나로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를테면 ‘매우 달콤하고 맛있는 빵이었다’ 라고 쓰는 대신 ‘그토록 말이 많던 준수는 그 빵을 먹는 동안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고 쓴다는 식이다. 전자는 애써 설득하려고 하는 티가 나서 거부감이 생기는 반면, 후자의 경우 자연스럽게 설득당하고 만다. 그러니 래퍼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그저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2012년 8월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첫 내한 콘서트에서의 에미넴. [사진 현대카드] |
-아빠, 이것 좀 봐요, 내가 만들었어요.
-아빠는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단다.
-아빠, 엄마는 어디 갔어요?
-나도 모른다. 저기 가서 놀아라. 아빠는 곡을 써야 돼
(…)
이러고선 딸을 사랑한다는 가사를 쓰지
-Eminem, 'When I’m gone' 일부
‘가장 감동적인 랩’ 1위(thetoptnes 선정)로 꼽히는 노래의 가삿말이다. 이 노래는 래퍼가 가진 딸에 대한 사랑, 죄책감, 후회, 책임감과 같은 복잡한 심경을 그리되, 딸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부녀간의 일상을 생생한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다.
이 ‘가장 감동적인 랩’ 목록에는 에미넴과 투팍의 곡이 유독 많다. 둘은 자신이 서술하는 바를 생생한 이미지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3위에 오른 에미넴의 'Stan'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는 술을 잔뜩 마신 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차를 몰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광기 어린 사람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랩은 시와 한 뿌리인데, 래퍼와 시인에게는 차이가 하나 있다. 시인과 달리, 래퍼는 자기 시를 소리로 만드는 발성(發聲)까지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랩은 종합예술이다. 이 종합예술가가 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사에 담을 좋은 사상과 드라마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데다, 그것을 읊을 때 필요한 좋은 소리와 연기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리와 연기력의 경우는 그 수준이 날로 발전하는 것 같아 걱정이 하나 없다. 하지만 가사의 질에 관해서는, 잠이 오지 않을 만큼 걱정이다. 그러니 마이크를 잡은 시인들이여, 부디 조금 더 고민해주길. 좋은 랩 듣는 걸 낙으로 삼은 나 같은 사람들이 계속 행복할 수 있도록.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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