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로 아들 잃은 이광기, 12년 만에 눈물로 쓴 에세이
신종플루로 아들 석규 잃고 자원봉사 눈 떠
12년 만에 슬픔 다독인 자전 에세이 펴내
"코로나로 힘든 분들께 공감·위로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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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쭉빼쭉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은 아빠가 장난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있다. 아이는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그림을 색칠한 뒤 오른쪽 아래에 ‘이석규 7’이라고 서툰 글씨로 적었다. 배우 겸 사진작가 이광기(52)씨의 아들 석규가 생전에 그리고 놀았던 스케치북의 마지막 페이지다.
이씨가 이를 발견한 건 아들 사망 이듬해인 2010년 카리브해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 자원봉사 가기 직전이었다. 현지 아이들에게 줄 옷가지, 학용품 등을 챙기다 이를 보고선 그대로 껴안고 오열했다. 그리고선 생각했다. ‘이 그림을 티셔츠에 디자인해서 선물하자.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아빠와 함께 있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거야.’ ‘LOVE&BLESS(사랑&축복)’라는 문구와 함께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 200벌이 아이티 아이들에게 건네졌다. 마치 석규를 다시 만난 듯, 그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껴안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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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신종플루로 일곱 살 아들을 떠나보냈던 이씨가 최근 펴낸 『내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되었다』(다연)에서 술회한 사연이다. 12년간 묻어놨던 가슴 속 이야기에 여러 작품 사진 등을 포토에세이 형태로 엮었다. 이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창 어여쁘고 활기찼던 아이가 독감을 앓은 지 사흘 만에 숨진 사실을 어느 부모가 감당할 수 있을까. ‘미친 놈처럼 울었다’ ‘아내가 실신했다’ ‘아들의 사망 보험금’ 등 목차만 봐도 당시의 비탄이 손에 잡힐 듯하다.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자선봉사, 미술경매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가 애끊는 단장(斷腸)의 기억을 다시 꺼낸 이유는 뭘까.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는데, 용기가 안 났어요. 아이 사진만 봐도 눈물이 나고…. 그러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고 길을 헤매고 있으니 제가 겪은 걸 나눠보자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생겼어요. 감염병 때문에 잃어버린, 평범하고 작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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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씨의 말이다. 솔직하게 이렇게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제가 잊고 싶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얘기 꺼내는 것도 싫었지만, 석규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싫었어요. 감사하게도 2012년 준서가 태어나서 석규에게 못 다준 사랑을 주고 있지만,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아봄으로써 그 아이가 내게 남겨준 것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요.”
아들의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날아온 취학통지서, 부모 앞에서 침착하던 첫째 딸 연지가 남몰래 침대에서 동생을 그리워하며 울던 모습, 아이가 구천을 헤매지나 않을까 상심하며 차 엑셀레이터를 미친 듯이 가속했던 밤 등을 토막토막 써내려갔다. “왜 내 아이어야만 하나?” 하는 원망과 슬픔에 짓눌린 시간이었다.
그걸 바꿔놓은 게 아이티 대지진 자원봉사다. 31만 여명이 사망한 참혹한 현장에서 이재민들을 위로하던 어느 날 밤 꿈에 아들이 나타났다. 떠난 지 100여일 만에 환한 모습으로 아이가 말했다. “아빠, 내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세요.”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세상에는 나만 아픈 게 아니다. 나보다 더 힘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았다. 앞으로 이 아이들을 도와줘야겠구나!’(101쪽)
그렇게 시작된 아이티와의 인연은 폐허 위에 학교를 지어주는 데까지 이르렀다. 월드비전과 서울옥션이 함께 한 ‘자선 미술 작품 경매’를 통해 구호기금 1억여원을 마련해 2012년 페티옹빌이라는 지역에 ‘케빈 스쿨’을 열었다. 케빈은 석규의 영어 이름. 이후 매년 아이티를 방문해 자라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봉사활동을 해왔다. 다만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방문하지 못했고, 방역 구호기금을 모금해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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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말처럼,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아이티에 학교를 짓기 위해 자선경매를 하고, 그걸 위해 미술작가들을 만나고 엮으면서 아예 제게도 새로운 길이 열렸죠. 과연 석규가 아니었으면 이런 일을 했겠나 싶어요. 대단한 일이란 뜻은 아니고, 힘들었던 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금 성숙해졌다고 할까요. 책 제목에 담은 것처럼 눈물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런 마음이 읽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랍니다.”
요즘은 유튜버·미술컬렉터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씨는 고교시절인 1985년 드라마 ‘해돋는 언덕’으로 데뷔해 30여 년간 ‘태조 왕건’ ‘정도전’ 등에 출연했다. 책 후반부엔 “요즘 드라마 왜 안 해요?” 같은 질문에 난처해하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밀려난 중견연기자로서의 솔직한 심정도 담았다. 이번 책의 수익금 전액은 기부된다. 절반은 월드비전을 통해 소외지역 학교 건축기금으로, 나머지는 청년작가들을 위한 영상아카이브 구축 지원에 쓰일 예정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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