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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여인들' 파려다 실종···이 공포가 홍콩 시위 불렀다

100만 봉기 ‘범죄인 인도법’ 목숨 걸고 반대 이유

4년 전 시진핑 스캔들 책 내려다 '퉁뤄완 5명 실종’

한 명은 홍콩에 있다가 강제로 중국으로 끌려가

법안 통과되면 홍콩의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믿어


중국이 굴복했다. 케리 람(林鄭月娥)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은 1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범죄인 인도법' 추진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전날 밤만 해도 주중 미 대사관의 부대사를 불러 "미국은 홍콩에서 손떼라"며 압박하던 중국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데 따른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 격화 속에서 홍콩에 또 하나의 전장이 생기는 데 중국은 부담이 컸다. 특히 740만 홍콩인 중 7분의 1 가까운 103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정도로 격앙된 홍콩의 민심이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홍콩 '피플 파워'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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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건 도대체 무엇이 100만 홍콩인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시위 현장으로 불러냈을까 하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법은 홍콩이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 법안 마련의 계기가 됐다. 홍콩인 천퉁자(陳同佳)가 대만에서 같은 홍콩인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혔다. 그러나 홍콩과 대만 사이엔 범죄인 인도조약이 없어 천을 대만으로 보낼 수 없었다.


이에 홍콩 정부는 홍콩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지 않은 나라들을 상대로 ‘범죄인 인도법’ 체결을 추진했다. 홍콩이 “범죄인의 도피 천당이 될 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다. 말은 틀리지 않는다. 한데 왜 이리 많은 홍콩인이 이 법에 반발하고 나선 걸까.


문제는 홍콩과 범죄인 인도를 체결하려는 국가에 ‘중국’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중국을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나 인권 운동가 등이 중국으로 송환되는데 이 법이 악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인의 격렬한 반발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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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같은 홍콩인의 우려는 기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홍콩인의 생각이다. 생생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2015년 발생한 홍콩 ‘퉁뤄완(銅鑼灣, 코즈웨이베이) 서점’의 주주와 직원 5명 실종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퉁뤄완 서점 실종’ 사건을 보도했던 홍콩 언론과 외신의 각종 내용을 종합해 사건의 자초지종을 살펴보면 왜 이 시점에 이렇게 많은 홍콩인이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를 나름 짐작할 수 있다.


퉁뤄완 서점은 1994년 린룽지(林榮基)가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2014년 ‘거류(巨流)미디어유한공사’에 매각했는데 구이민하이(桂民海, 34%)와 리보(李波, 34%), 뤼보(呂波, 32%) 등 세 명이 주주가 됐다. 린은 서점 점장으로서 계속 경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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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스캔들 관련 책을 출판하려다 실종된 퉁뤄완 서점 관련자 5명 중 유일하게 용기를 내 실종 사건 전말을 폭로한 건 린룽지 한 사람뿐이었다. 린은 2015년 10월 24일 중국에 붙들렸다가 2016년 6월 14일 홍콩으로 돌아왔고 6월 16일 실종 사건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홍콩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 서점은 중국 대륙에서 출판할 수 없거나 판매할 수 없는 책을 파는 곳으로 유명했다. 고객 상당수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여행을 온 사람들로 이들은 일부러 이 서점을 들러 많은 정치 관련 서적을 사 갔다.






홍콩은 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주권이 넘어갔지만 ‘한 나라 두 체제(一國兩制)’란 덩샤오핑(鄧小平)의 구상에 따라 50년간 고도의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았다. 즉 2047년까지는 철저하게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港人治港)’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홍콩 내 여러 서점은 중국에서 매매가 되지 않는 이른바 ‘금서(禁書)’를 팔아 재미를 봤다. 금서엔 과거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을 그린 것과 함께 중국 고위 지도자의 스캔들을 파헤친 게 적지 않았다.


가끔 중국 당국으로부터 구두 경고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중국 정부의 태도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식의 비교적 관대한 편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2012년 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 ‘중국의 대부 시진핑’이란 책을 출판하려던 홍콩 천중(晨鐘)서국(書局)의 출판인 야오원톈(姚文田)이 홍콩에 이웃한 중국 선전(深圳)에서 체포됐다. 2015년 5월, 당시 73세이던 야오는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우치(五七)학사(學社)의 책임자 우이산(武宜三)이 대신 책을 출판하려다 ‘깜짝 놀랄 협박 전화’를 받고 계획을 접었다. 2014년 5월엔 정치간행물 ‘신웨이(新維)월간’을 펴내던 왕젠민(王健民)이 선전의 집에서 붙들려 5년여의 징역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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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뤄완 서점이 중국 당국의 타깃이 된 건 시진핑 주석의 사생활, 특히 애정 문제를 파헤친다는 책 출판을 준비하면서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이 책엔 ‘시진핑과 그의 여섯 여인(Xi and His Six Women)’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표지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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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뤄완 서점 [사진 위키피디아]

세 명의 주주 중 한 사람인 리보에 따르면 또 다른 주주 구이민하이는 과거 중국 고위 지도자의 정부(情婦)와 관련된 글을 써 이미 여러 차례 경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준비한 서적은 너무나 민감했다. ‘실종’의 비극이 잇따라 발생한 것이다.

먼저 3대 주주 중 하나인 뤼보가 2015년 10월 14일 갑자기 사라졌다. 중국 선전에 있는 아내의 집에서 연행됐다고 한다. 3일 뒤엔 태국 파타야 아파트에 있던 구이민하이가 낯선 남자들에 이끌려 자취를 감췄다.


10월 24일께는 거류미디어유한공사의 직원 장즈핑(張志平)이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의 아내 집에 있다가 10여 명의 사복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같은 날 퉁뤄완 서점의 점장인 린룽지가 선전에 갔다가 역시 사복 차림의 사람들에 의해 붙들렸다.


홍콩인을 경악시킨 건 다섯 번째로 실종된 리보의 경우였다. 4명이 잇따라 실종된 뒤 그는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서적이란 게 민감할수록 잘 팔리지만 근년 들어 “감히 대륙에 갈 수는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대륙에 가지만 않으면 내가 실종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2015년 12월 30일 홍콩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리보의 부인 차이자핑(蔡嘉苹)은 홍콩의 친중국계 신문인 대공보(大公報)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차이에 따르면 리보가 실종되는 날 어떤 이가 전화를 걸어와 시진핑 관련 책들을 사겠다고 했다. 이에 리보가 홍콩의 차이완(柴灣)에 있는 창고로 직접 책을 가지러 갔는데 이후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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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의 경우 중국을 드나들 때 사용하는 고향 방문증인 ‘회향증(回鄕證)’이 그대로 집에 있었다. 훗날 어떻게 중국에 갈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리보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말로 더 이상의 답을 피했다.

이로써 거류미디어의 세 명 주주와 직원 하나, 그리고 퉁뤄완 서점의 점장 등 모두 5명이 2015년 10월과 12월 석 달 사이에 실종됐다. 세 명은 중국에서, 한 명은 태국에서, 마지막 한 명은 홍콩에서 사라졌다.









특히 홍콩에서 실종된 리보의 케이스에 홍콩인은 경악했다. 이전엔 중국에 가는 걸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고도의 자치를 허용 받는 홍콩에서, 그 어떤 홍콩인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실종된 5명은 이후 어떻게 됐나. 가장 먼저 사라졌던 뤼보가 2016년 3월 4일 홍콩으로 돌아왔고 이틀 후 직원 장즈핑도 귀환했다. 3월 24일엔 리보, 6월 14일에는 린룽지가 다시 홍콩 땅을 밟았다.


그러나 구이민하이는 3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처음엔 이들의 실종 사건 배경을 잘 몰랐다. 이들이 중국 지도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금서 출판을 계획했다가 중국 당국의 괘씸죄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만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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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2016년 6월 홍콩으로 돌아온 린룽지가 용기를 내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린은 자신을 조사했던 중국 당국 관계자로부터 퉁뤄완 서점의 고객 명단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고 홍콩에 왔다가 생각을 바꿨다.

6월 16일 홍콩 민주당의 입법회 의원 허쥔런(何俊仁)을 찾아갔고 그날 저녁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실종 사건 전말을 폭로했다. 16일은 린이 퉁뤄완 서점 실종 사건을 폭로한 지 만 3주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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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룽지에 따르면 그는 2015년 10월 24일 홍콩에서 선전으로 넘어가다 붙잡혔다. 이후 열 서너 시간가량 차를 타고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의 한 건물로 끌려가 자살방지 시설 등이 마련된 방에서 조사를 받았다.

린은 그곳에서 가족과 변호사를 부르는 걸 포기한다는 각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고 욕설과 위협 속에 서점 경영과 관련된 각종 조사를 받았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찍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린은 기자회견에서 “만일 우리가 소리를 내지 못하면 홍콩은 구원받을 수 없다”며 “이번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홍콩인의 인권과 자유와 관련된 일이며 퉁뤄완 서점 직원 실종 사건은 중국이 ‘한 나라 두 체제’ 제도를 위반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콩으로 돌아온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당시 홍콩 정무사(司) 사장이 현재 홍콩특구 행정장관인 캐리 람이었지만 사건 해결에 이렇다 할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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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룽지는 캐리 람 정부가 중국에도 범죄인 인도를 가능케 하는 법안을 마련해 지난 3월 말 1차 심의를 하자 짐을 꾸렸다. 그리고 지난 4월 25일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향했다. 법안이 시행되면 자신이 중국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홍콩에선 13만 명이 나와 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법안 2차 심의(6월 12일)를 앞둔 지난 9일엔 100만이 넘는 홍콩인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법안이 확정될 경우 덩샤오핑이 50년 고도 자치를 약속했던 홍콩에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그 어떤 홍콩인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 100만 홍콩인을 최루탄과 고무탄, 벽돌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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