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숙이씨 나 몇 점이에요”…예순에 사랑꾼 된 ‘삐죽이’ 정진영

[민경원의 심스틸러]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김상식

사고로 무뚝뚝 가장서 22살 신혼으로 회귀

선굵은 역할 중후함 벗고 귀여운 매력 뽐내

데뷔 32년만 영화감독 꿈 이뤄 행복한 청춘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 몇 점쯤 돼요? 내가 평생 99점짜리 남편이 되어주겠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요.”


tvN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에서 김상식(정진영)은 이진숙(원미경)에게 이렇게 묻는다. 극 중 산에서 당한 조난사고로 기억을 잃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1982년으로 돌아간 22살 사랑꾼 김상식에게는 로맨틱한 질문이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60살 이진숙에게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부부로 살아온 38년 동안 서로 다정했던 시간보다 악다구니를 쓰며 다툰 기억이 더 많을뿐더러 오랜 세월 졸혼을 준비한 그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된 탓이다.


사실 남편으로서 김상식의 점수를 매기자면 99점은커녕 9점에 가깝다. 트럭 운전을 하는 직업 특성상 지방 출장이 잦아 집을 비우기 일쑤인 데다 간혹 집에 있다 해도 없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아내가 힘들까 봐 손이 노랗게 될 때까지 귤을 까주던 22살 청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싼 과일 사 먹는다며 집어던지고 유리창까지 깨트릴 정도로 폭력적으로 변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남편이 말끝마다 “숙이씨”라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 1988년 연극 ‘대결’로 데뷔한 이래 배우 정진영(56)은 주로 선 굵은 캐릭터를 선보여 왔으니 말이다. 2002~2006년 진행을 맡았던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냉철한 모습이나 ‘천만 영화’에 등극한 ‘왕의 남자’(2005)의 연산이나 ‘국제시장’(2014)의 덕수 아버지처럼 강인하고 올곧은 연기가 주특기였다. 그런 그가 ‘삐침의 삐죽이’ ‘애절한 삐죽이’ ‘의기양양한 삐죽이’ 등 일명 ‘삐죽이 3형제’라 일컬을 만큼 귀여움을 뽐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눈빛부터 표정까지 모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정진영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 모습도 제법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마치 가족이 서로에 대해 제일 잘 알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익숙함이 빚은 고정관념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알지 못하는 아빠와 엄마의 청춘처럼 말이다. 가장의 어깨에 쌓인 세월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 등을 걷어내고 나면 그들도 원래 지니고 있던 천성이 나온다고 해야 할까.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눈빛은 해맑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 우리 부모님도 그랬을까 하고 자꾸만 반추하게 된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평생 이 사진을 봤는데 이 시절 엄마·아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자책하는 둘째 딸 김은희(한예리)처럼 엄마·아빠의 시시콜콜한 취향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대학가요제를 유독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매년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바치는 바람에 곡 순서까지 모두 외울 지경이 됐지만 정작 그것이 아빠의 오랜 꿈이었단 사실은 몰랐던 것처럼 과연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몇 점짜리 자식일까를 곱씹게 한다. 드라마에서처럼 배다른 자식, 동성애자 남편, 수상한 두집 살림 등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산 것이 아니더라도 주위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인 셈이다.


극 중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내 꿈은 대학 가요제 나가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기타를 잘 치고 하모니카를 멋있게 불고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대학생이 아니면 나갈 수가 없는” 탓에 “진짜 저 멀리 있는 꿈”이었다고 말이다. 트럭에 숨겨둔 기타를 꺼내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새삼 ‘꿈’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실감케 한다. 못다 이룬 꿈이 아쉬울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이 눈물겨울 수도 있지만 그저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될 수도, 용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정진영은 최근 오랜 꿈을 이뤘다. 지난달 18일 개봉한 영화 ‘사라진 시간’을 통해 감독 데뷔를 한 것.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의 연출부 막내 시절 갑자기 잠수를 탄 배우의 대타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할 만큼 오랫동안 감독의 꿈을 품어왔다. 사고로 현실이 증발하며 벌어지는 혼란을 담은 다소 난해한 이야기로 현재 누적 관객 수는 18만명. 손익분기점(27만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그는 흥행 성적과 무관하게 행복해 보였다. 32년 연기하는 동안 가슴 한구석에 꿈틀대던 것을 꺼내놓은 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만함을 안겨준 덕분이다. 새로운 활력을 얻은 그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실시간
BEST
joongang
채널명
중앙일보
소개글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