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의 레저터치] 마지막 글도 '여행' 고민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주영욱 19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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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 고(故) 주영욱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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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변을 당한 고(故) 주영욱씨의 빈소가 차려진 일산병원 장례식장.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의 빈소는 아직 조문객의 발길이 뜸했다. 유족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조문객도 다르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비보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쩔쩔매는 고인의 벗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21일 주영욱 ‘베스트레블’ 대표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가 종일 쏟아졌다. 조선일보의 첫 보도를 거의 그대로 베낀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끔찍한 현장을 묘사한 대목부터 그를 ‘유명 여행·음식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한 구절까지 수많은 매체가 1보 기사를 인터넷에서 무한 재생했다. 황망한 부고는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믿기지 않았다. 아마도 믿기 싫어서였을 터이다.
고 주영욱. 그는 누구였을까. 21일 부고는 고인을 ‘유명 여행·음식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했다. 고인은 2012년부터 ‘중앙선데이’에 맛집 칼럼을 연재했고, 그 원고를 엮어 『맛있는 한 끼』(덴스토리, 2015)를 펴냈다. 여러 곳에서 여행·음식 관련 강연도 했고,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하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좀처럼 앞세우지 않았다.
나에게 그는 여행사 사람으로 기억된다. 고인의 작업을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다. 여행사 대표였을 때 그는 가장 빛났다. 나는 고인만큼 자부심 강한 여행사 대표를 만난 적이 없다. 여행사 베스트레블이 판매하는 모든 상품은 고인이 전 세계를 돌며 손수 개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여행상품을 “자랑이자 자존심”이라고 불렀다. 고 주영욱은 여행상품을 파는 업자가 아니라 300번이 넘는 해외여행 경험을 나누려 했던 여행가다. 진짜가 드문 시대, 그는 진짜 여행사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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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 사람 주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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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식당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광화문의 국밥집에서 같이 냉면을 먹을 때였다. 요리는 젬병이라고 진즉에 고백했었다. 대신 입맛이 까다로웠다. 특히 냉면과 와인에 예민했다. 식당 이름도 정해놨었다. 유자방. 공자님 말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빌렸다. 처음엔 제주도를 꿈꿨는데 포르투갈로 바꿨다고 했다. 포르투갈 해변 어디쯤, 대서양 편서풍이 불어오는 석양 찬란한 언덕에서 식당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원래 그는 마케팅 리서치 전문가였다.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글로벌 리서치 기업의 한국 법인 CEO를 역임했다. 그 시절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고, 수많은 음식을 경험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2013년 여행사를 차렸다. 돈이 욕심 나서가 아니었다. 제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의 여행상품은 오롯이 그가 경험한 여행에서 비롯됐다.
하여 베스트레블의 여행상품은 특징이 뚜렷했다. 다른 여행사에는 없는 지역을, 다른 여행사에는 없는 방식으로 여행했다. 여정이 특별하고 독보적인 데도 상품 가격이 의외로 낮았다. 여행사 대표가 직접 현지에 날아가 독점 계약한 뒤 상품을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전 상품 노팁·노옵션·노쇼핑. 그의 경영 원칙이다.
그가 한국에 처음 선보인 대표적인 여행상품 두 개가 있다. 첫째가 ‘장강삼협 크루즈’다. 고급 크루즈를 타고 중국 양쯔강을 여행하는 여정으로 2014년 그가 처음 수입·판매했다. 이른바 ‘양쯔강 크루즈’로 불리는 이 상품은 베스트레블이란 신흥 여행사를 여행업계에 각인시킨 효도 상품이자, 나아가 덤핑이 판치는 중국 패키지여행 시장에 짜릿한 한 방을 먹인 주인공이었다. 베스트레블의 양쯔강 크루즈가 매진 행렬을 기록하자 국내 대형 여행사들이 앞다퉈 ‘카피상품’을 쏟아냈다. 대형 여행사의 횡포에 분개하던 그의 목소리가 여태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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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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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만든 또 다른 히트 상품이 아프리카 트럭 여행이다. 이름하여 ‘아프리카 트럭킹(Trucking)’. 버스처럼 개조한 트럭을 타고 아프리카 초원을 질주하는 모험이다. 나는 그와 함께 중앙일보 독자를 모시고 떠나는 아프리카 트럭 여행을 기획했다. 11월 23일 출발해 12월 8일 돌아오는 13박15일의 여행이다. 이 여행을 준비한다고 우리 둘은 올 초부터 수시로 연락했고,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여행과 꿈, 그리고 인생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지난 11일 오후 7시. 중앙일보 건물에서 아프리카 트럭 여행 여행설명회가 열렸다. 그가 중앙일보 독자에게 자신의 여행법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60명이 넘는 독자가 모였고, 2시간이 넘는 설명회가 끝나자 10여 명이 예약을 마쳤다.
설명회 이튿날인 12일 오후 9시쯤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 여정과 유사한 다른 여행사의 여정이었다. “가격도 우리가 200만원 이상 싸고 내용도 훨씬 알차다”는 그의 메시지에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연하죠.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이게 마지막 대화였다는 건 알지 못했다.
고인의 메신저 프로그램 첫 화면. 사진은 나미비아 에토샤 국립공원을 고인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 주영욱 카카오톡] |
18일 이번에는 내가 문자를 보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그에게 나는 예약 상황을 물었다. 하루가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전 세계 어디에 있어도 하루 넘게 답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는 14일 출국했고, 18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뒤늦은 부고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신저 대화창을 열었다. 메인 화면에 영어로 된 다음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 전엔 눈에 안 띄었던 구절이다.
‘We leave something of ourselves behind when we leave a place(우리가 어떤 장소를 떠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남겨둔다).’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진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문장이다. 원문은 다음 문장과 이어진다. ‘우리가 사라져도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We stay there, even though we go away).’ 여행을 말할 때 종종 인용되는 구절이나, 새삼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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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간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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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이런 여행사입니다. 규모가 작고 역사도 짧습니다. 고객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객 한 분 한 분이 그저 스쳐 가는 분들이 아니고 감사하고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희는 여행 상품을 직접 만듭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족과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직접 하나하나 확인하고 제대로 준비한 여행 상품만을 판매합니다. 상품 모두가 저희의 자랑이고 자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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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15일 오후 2시 18분 페이스북에 올린 문장의 일부다. 이 글은 고인이 숨진 뒤인 17일 ‘중앙일보’ 14면 하단 광고에 실린 문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필리핀에 가서도 여행상품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6일 오전 8시쯤 필리핀의 어느 길바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페이스북에 마지막 글을 올린 지 19시간 뒤다(한국이 1시간 빠르다). 너무 끔찍해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차마 묘사하지 못하겠다.
아직도 모르겠다. 그가 왜 필리핀에 갔는지. 보도에 따르면 상품을 개발하려 했다는데, 베스트레블은 필리핀 상품을 팔지 않는다. 당분간 계획도 없었다. 나도 잘 안다. 우리는 내년까지 공동 기획할 상품을 일정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도시는 관광과 딱히 관련이 없다. 마닐라 인근 안티폴로는 한국인에게 유학 도시로 알려져 있다. 국제학교가 있어 유학생이나 영어 캠프 참가자가 방문한다. 천생 여행가인 그가 유학 시장을 넘봤던 것일까. 그 19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읽다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내가 기억하는 여행가 주영욱이 그대로 있었다. 느릿느릿, 특유의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할 때의 그 호흡이었고, 그 말투였다. 그가 없는 자리가 너무 휑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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