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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대통령의 피란살이는 굽이굽이 눈물의 현대사

손민호의 레저터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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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지막 가시는 모습은 여행기자의 눈에도 밟혔다. 허둥지둥 피란 내려와 평생을 가난과 싸우다 돌아간 당신은 어쩌면 이 시대 어머니의 삶 그것이었다. 대통령 어머니 고(故) 강한옥 여사의 부고를 따라 읽다가 피란살이의 한숨이 밴 남해안의 갯마을을 떠올렸다. 여행기자로서 나는 대통령 가족의 피란살이 현장 몇 곳을 목격했다. 그 인연을 예 소개한다. 오해는 마시라. 이 이야기는 여행기자가 지켜본 현대사의 기록이자, 가슴에 고향을 묻고 살다 간 피란민에 바치는 위로일 따름이다.



오두막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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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경남 거제도 명진리에서 태어났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약 4㎞ 남쪽에 있는 농촌이다. 1950년 12월 대통령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LST(미군 수송선)를 탔다. LST는 피란민 대부분을 부산에 내려놨는데, 마지막 3척은 거제도까지 더 내려갔다. 이미 부산은 만원이었다.


대통령 가족은 임시수용소에서 머물다 인근 마을에 정착했다. 처음엔 변변한 거처를 구하지 못했다. 농가 헛간 같은 오두막에서 겨우 비를 피했다. 1953년 강한옥 여사의 출산이 임박했다. 집주인이 오두막 산모에게 방 한 칸을 내줬다. 그 방에서 대통령이 태어났다. 100일이 지나자 산모와 아기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고, 어머니는 부산에서 계란 행상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도에서 싸게 산 계란을 머리에 이고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행상을 했다. 그때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야 부산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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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통령이 태어난 집에는 돌아간 주인아주머니의 아들이 산다. 외부인 출입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의 등쌀에 집주인이 험한 경고문을 써 붙이고 철조망을 둘렀다. 생가를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쉽다. 거제시청이 길목마다 안내판을 붙여놨다. 마을 어귀에 번듯한 주차장도 들였다.


자치단체의 과잉 행정과 상관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보이는 허름한 농가도 대통령의 집은 아니다. 이제는 흔적도 없는 오두막에서 꼬마 문재인은 무럭무럭 자랐다. 대통령 가족은 거제도에서 7년쯤 더 살다 부산 영도로 넘어갔다.



산으로 올라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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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하면 산이 먼저 떠오른다. 이름에도 산이 들어있다. 부산은 가마솥(釜)을 닮은 산(山)이 있는 고장이다. 그 산자락마다 사람이 들어가 산다. 부산의 산은 나무만큼 사람도 많다. 하여 부산의 산은 마을이다. 산복(山腹)도로. 부산의 산동네를 잇는 도로 이름이다. 산으로 올라간 마을의 사연은 곡진하다. 부산의 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사람 이야기다.


부산역과 부산항 주변으로 초량동·수정동·영주동·범일동·우암동·문현동, 자갈치시장 앞으로 남포동·광복동·부평동·보수동, 부산공동어시장 주변으로 부민동·감천동·아미동, 그리고 영도의 남항동·영선동·봉래동·신선동…. 생각나는 대로 적은 부산의 피란민 마을이다. 피란민 마을 대부분은 기차역과 항구 앞에 붙어 있거나 산 중턱에 걸려 있다. 해방 이전에 30여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한국전쟁 이후 70만 명이 훌쩍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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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동 산복도로에서 올라서면 지금도 부산역에 들어오는 기차가 내려다보인다. 산동네 피란민은 기차가 들어오면 역으로 달려 내려갔다. 기차가 도착하면 먹을 게 생기기 때문이었다. 초량동과 부산역 사이에 168계단이 있다. 그 가파른 계단을 피란민은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찾아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아이들은 물지게를 지고 위태로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168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지금도 옛 우물이 남아 있다.


감천동은 시방 부산에서 제일 북적이는 명소 중 하나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다. 감천동은 종교단체가 처음 터를 잡았다. 하여 집마다 크기도 모양도 비슷하다. 비탈을 따라 들어선 피란민의 집은 놀랍게도 뒷집의 조망을 가리지 않는다. 다른 산동네도 앞집이 뒷집의 햇빛을 가리지 않는다.


감천동 옆 아미동은 비석 마을로도 불린다.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어서다. 묘지에 쓰인 비석을 축대로 써 그 위에 집을 얹었다. 부산의 산동네에는 무덤 위에 들어앉은 마을이 수두룩하다. 우암동은 원래 소막마을이라 불렸다. 우암동의 피란민은 우사(牛舍)에 들어가 살았다.


육지의 피란민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영도는, 육지에 터를 잡지 못한 피란민이 떠밀려 정착한 동네다. 육지의 산동네가 넘쳐나자 피란민은 바다 건너 영도로 들어갔다. 전쟁 직후 영도 사람은 줄배를 타고 육지를 드나들었다. 영도에서 배를 타면 자갈치시장이 바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대통령 가족은 부산의 피란민 사회에서도 제일 밑바닥에 있었던 셈이다. 부산가톨릭 의료원 메리놀병원. 대통령 어머니가 이 병원에서 임종했다. 영도에서 직선거리로 2㎞도 안 된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통령이 됐어도 영도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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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은 왜 한결같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그 시절 우리나라 최고의 랜드마크가 영도다리였기 때문이다. 1934년 완공된 영도다리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도개교다. 당시 일제의 최첨단 건축 기술이 투입됐다. 영도다리는 그 시절의 남산타워였고, 63빌딩이었다.


2013년 영도다리가 다시 올라갔을 때, 전국에서 엄청난 관광객이 몰렸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요즘엔 오후 2시마다 다리가 들린다. 영도다리 도개 행사가 재개한 직후.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어르신들이 올라가는 다리를 보며 울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영도다리 앞으로 점집이 늘어선 시절이 있었다. ‘점바치 골목’이라 불렀다. 왜 점쟁이들이 영도다리 앞에 모여 있었을까. 다리 아래에서 헤어진 가족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피란민은 점쟁이에게라도 가족의 생사를 묻고 위안을 얻었다. 영도다리에선 유난히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피란민이 고단한 피란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렸다. 1950년대 영도다리에서 248명이나 구한 경찰도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초원복집에서 이 말이 녹음됐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이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다. 사실 “우리가 남이가” 다음 말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되면 부산 사람들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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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점바치 골목은 영원히 사라졌다. 마지막 점집이 문을 닫기 전에 직접 점을 본 적이 있다. 점집 할머니는 출생연도와 띠를 묻고는 엽전을 몇 번 던졌다. 그리고 “잘하고 있어. 하던 대로 하면 돼”라고 북돋웠다. 2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뜻깊은 문화관광 콘텐트를 왜 없앴느냐” 따졌더니 부산시와 중구청은 재개발 계획 핑계를 댔다. 종교적인 고려도 있었다고 했다. 피란수도를 구호처럼 앞세우는 부산시의 행정이 이렇다.



‘깡깡이 아지매’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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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아버지는 무능했다. 고향에서 함흥농고를 졸업한 아버지는 피란 내려오기 전 흥남시청 농업계장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장사에 손댔다가 오히려 빚만 졌다. 어머니가 대신 가장을 떠맡았다. 구호물자 옷가지를 팔기도 했고, 연탄도 배달했다. 연탄 가게를 한 게 아니라 연탄을 사다 영도의 산동네 피란민에게 팔았다.


영도의 피란민 어머니를 상징하는 단어가 있다. ‘깡깡이 아지매.’ 옛날 영도 어귀 조선소에선 선박의 녹을 벗길 때 망치를 사용했다. 망치로 배를 때릴 때 깡깡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피란민 아지매들이 이 위험한 작업을 했다. 아파트 4, 5층 높이 허공에 떠 있는 널빤지에 앉아 온종일 망치질을 했다. 깡깡 소리 때문에 귀를 먹은 아지매도, 널빤지에서 떨어져 불구가 된 아지매도 많았다. 대통령은 어머니가 부산역에서 암표 장사를 할 뻔했다는 일화는 소개한 적 있지만, 깡깡이 아지매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영도에는 ‘이송도’라는 지명이 있다. 해안 산책로가 난 영도 서쪽 해안을 이른다. 국내 최초 해수욕장이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이다. 그 송도처럼 예쁜 바닷가라고 해서 ‘이송도’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초등학생 문재인은 종종 이송도에 내려가서 놀곤 했다. 남항초등학교. 대통령이 졸업한 초등학교다. 이송도 바로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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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피란민은 가파른 해안절벽에 기대어 살았다. 변소도 제대로 없는 그 벼랑 동네가 지금은 흰여울마을이라 불린다. 요즘엔 예쁜 카페가 줄줄이 들어서 인증사진 찍으려는 청춘으로 붐빈다. 그 벼랑 마을의 한 빈집에서 영화 ‘변호인’을 촬영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했던 부림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영화에서 국밥집 아들로 나온 청년이 있다. 송병곤이라는 실존 인물이다. 흰여울마을의 빈집이 영화에서 그의 집으로 나온다. 송병곤은 대통령의 부산 법무법인에서 일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먼저 간 친구가 사무쳤을 것이고, 영도에서의 진저리나는 피란살이가 떠올랐을 것이다.



부산 밀면과 돼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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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소울푸드는 대부분 피란민과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자갈치시장 골목의 곰장어구이. 곰장어는 장어가 아니다. 다른 생선의 살을 파먹는 기생 어류다. 일본인도 곰장어는 안 먹었다. 대신 껍질을 벗겨 신발을 만들었다. 껍질 벗겨진 곰장어를 자갈치 아지매들이 매운 양념 넣고 연탄불에 구운 게 지금의 곰장어구이다.


돼지국밥은 돼지고기로 설렁탕 맛을 낸 음식이다. 신창국밥·할매국밥·송정3대국밥·쌍둥이돼지국밥 등 돼지국밥 명가가 여러 곳 있지만, 부산의 돼지국밥은 맛이 비슷하다. 대부분 뼈째 삶아 국물이 무겁다. 대신 고릿한 냄새는 감수해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은 정구지(부추)가 수북해야 한다. 대통령은 돼지국밥을 참 좋아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과 ‘변호인’을 관람하고서 먹은 음식도 돼지국밥이다.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이었을 땐 사상구 돼지국밥 지도를 트위터에 공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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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면은 우암동의 내호냉면에서 탄생했다. 냉면을 먹고 싶은 피란민이 메밀이 부족하자 구호품 밀가루로 냉면 맛을 낸 게 시작이라고 알려졌으나, 내호냉면에서 들은 얘기는 조금 다르다.


1959년쯤 우암동 동항성당의 신부님이 배급 나온 밀가루로 ‘삯국수’를 해달라고 내호냉면에 부탁했다. 삯국수는 면 뽑는 삯만 받는 국수라는 뜻으로 면 요리를 즐기는 이북에서 흔했다고 한다. 당시 내호냉면의 2대 대표 고 정한금 여사가 오랜 시도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 비율을 7대 3으로 밀냉면을 만들었다. 내호냉면은 여전히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면을 뽑지만, 요즘의 부산 밀면은 대부분 밀가루 면만 쓴다.


내호냉면은 올해 개업 100년을 맞았다. 함경남도 흥남 내호시장 입구의 ‘동춘면옥’이 원조다. 현재 4대 주인의 증조 외할머니가 1919년 10월 문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 출신이다. 동춘면옥은 당시 흥남에서 제일 유명한 농마국수(함흥냉면) 집이었다. 대통령의 어머니도 동춘면옥 농마국수를 알고 있었을 터였다. 실제로 대통령은 내호냉면 단골이었다.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를 모시고 자주 찾았다고 한다. 지금도 내호냉면의 함흥냉면은 이북에서의 맛이 남아있다고, 피란민 어르신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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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호냉면 가족은 1950년 12월 25일 흥남부두에서 LST를 탔다.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피란민이 너무 많아서 거제도에서 내렸다. 대통령 부모의 사연과 같다. 대통령은 LST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왔었다는 가족의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내호냉면 벽에 볼펜으로 그린 내호리 지도가 걸려 있다. 2009년 정한금 여사의 남편 고 유복연씨가 돌아가기 열흘 전 그린 유물이다. 유복연씨도 대통령의 아버지처럼 함흥농고를 나왔다. 그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갔다. 대통령의 부모도 다르지 않았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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