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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같은 풍경…거꾸로 걸으니 열네살 올레길 또 새롭네

종점에서 시작점으로 걷다보면

전에 갔던 길인데 완전 다른 느낌


올레길이 백신…완주자 71% 늘어

모처럼 맘껏 숨쉬며 저마다의 길



다자우길 ① 제주올레 10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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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사람들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닫힌 공간에서 나와 온몸으로 열린 세계와 만나고 있습니다. 확 트인 자연만큼 안전한 곳도 없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여행만큼 안전한 레저 활동도 없습니다. 중앙일보가 매달 전국의 걷기여행길 중에서 추천 코스를 골라 하나씩 걷습니다. 다자우길. ‘다시 걷자, 우리 이 길’의 준말이자,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내자는 다짐의 구호입니다.


다시 올레길을 걸었다. 10년쯤 전 힐링 열풍이 불었을 때도 올레길부터 걸었다. 그 시절 전국에 불었던 걷기여행 바람이 2007년 시작된 올레길에서 비롯됐다. 다들 힐링을 말하던 그때 사람들은 길에서 위안을 얻었다. 코로나 시대 2년째, 다시 길을 걷기로 작정했으니 올레길에서 걸음을 시작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제주올레 서명숙(64) 이사장이 10코스를 걷자고 했다. 동행은 고마운데, 10코스를 고른 건 의외였다. 제주올레 26개 코스 중에서 10코스는 7코스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코스다. ㈔제주올레가 완주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10코스는 7코스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너무 뻔하지 않나 싶었는데, 서명숙 이사장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거꾸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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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올레’하자. 거꾸로 걷자고. 종점에서 시작해서 시작점으로 돌아오자고. 10코스는 역방향으로 걸을 때 제일 예쁜 길이야.”


역올레. 제주올레가 5년 전 걷기축제 때부터 쓰는 방식이다. 제주올레는 시계 방향으로 코스가 이어진다. 1코스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해안을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돈 뒤 21코스 제주시 구좌읍 종달 포구에서 끝난다. 제주올레 걷기축제가 시계 방향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자, 2016년부터는 코스마다 시작점과 종점을 바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제주도를 다시 돌고 있다.


역올레는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이미 걸어온 길도 거꾸로 걸으니 처음 걷는 것 같았다는 올레꾼이 많았다. 같은 길도 걸을 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하물며 거꾸로 걸으니 전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솔직히 제주올레여서 가능한 시도였다. 길목마다 이정표가 잘 돼 있고, 길 정보가 체계를 갖춰 거꾸로 걸어도 길 잃을 염려가 없었다. 역올레 덕분에 제주올레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코스를 두 배 거느리게 되었다.


10코스를 거꾸로 걸으려면 제주도 서남쪽 모서리 모슬포로 가야 했다. 마침 날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모슬포 하늘은 바다처럼 파랬다. 모슬포는 ‘못살포’라고 불릴 만큼 바람이 드센 고장이다. 고맙게도 이날은 바람도 잠잠했다. 서명숙 이사장이 “걷기여행 시작해서 기특하다고 설문 할망이 도와주나 보다”고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에선 날이 좋아도 설문 할망을 찾고, 날이 나빠도 설문 할망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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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읍내에서 빠져나온 길은 하모해수욕장으로 이어졌다. 옛날 ‘멜(멸치)’이 많이 올라와 ‘멜케’라 불리던 해변이다. 해안과 나란하던 길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정평야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들녘이 장쾌하게 펼쳐졌다. 대정평야는 제주도 최대 마늘 산지다. 지금은 농부들이 무 수확에 한창이었다. 역방향으로 걸으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다크 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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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에 들어섰다. 알뜨르는 ‘아래에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넓게 보면 대정평야에 속하는 들판이나 알뜨르라는 낱말에는 훨씬 더 많은 울림이 담겨 있다. 알뜨르는 국내 다크 투어리즘의 성지와 같은 장소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을 이른다.


알뜨르는 일제 강점기 전투기 비행장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격납고 19기가 여전히 마늘밭 곳곳에 흉물처럼 남아 있다. 이 알뜨르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가미카제(神風) 훈련기다. 실제로 일본군 전투기 600기가 이 들판에서 날아올라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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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에서 섯알오름 가는 길목에 검은 비석이 서 있다.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추모비 뒤로 웅덩이 두 개가 있다. 제주 4·3의 대표적인 학살 현장으로, 이들 웅덩이는 제주 4·3 유적지 중 가장 가혹한 사연을 담고 있다.


1950년 8월 20일 계엄군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연행한 양민 210명을 이 자리에서 총살했다. 계엄군은 숨진 양민을 웅덩이에 던진 뒤 접근을 막았다. 웅덩이가 개방된 건 그로부터 7년 뒤였다.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살은 썩어 문드러졌고 뼈는 엉켜 있었다. 고민 끝에 유족은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와 등뼈 하나씩 놓고 얼추 유골을 맞췄다. 한 벌씩 한 벌씩 맞춘 유골을 모아 132기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百祖一孫墓)다. 조상은 백 명이나 자손은 하나인 무덤. 조상을 알 수 없어서 모든 조상의 자손이 되어 모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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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시린 현장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섯알오름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정면으로 산방산이 보이고 멀리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졌다. 정방향으로 걸었으면 돌아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서명숙 이사장이 “선물 같은 풍경”이라며 “바로 이 전망 때문에 10코스는 역방향이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고 말했다. 둘이서 오름 풀밭에 누워 한참 바다를 바라봤다.


길이 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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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에서 나온 길은 다시 오름으로 들어갔다. 송악산(松岳山). 익숙한 이름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지 않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절울이오름. ‘절’이 물결을 가리키므로, 물결 우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파도가 송악산 해안절벽과 부딪혀 울리는 소리에서 이름이 나왔다.


송악산 해안절벽에 일본군이 판 진지동굴 15개가 있다. 옛날에는 이 동굴에 들어가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지금은 입구가 막혔다. 제주도 사람은 송악산 해안동굴을 ‘일오동굴’이라 한다. 동굴이 15개여서 일오(15)다. 송악산 능선과 해안에서 찾아낸 일본군 진지동굴만 60개가 넘는다. 송악산은 가장 많은 일제 군사시설이 발견된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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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을 돌아 나와 사계 해변을 따라 걸었다. 정방향으로 걸을 땐 지나쳤던 산방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에서 커졌다. 반대편에서 정방향으로 걸어오는 올레꾼이 눈에 띄었다. 우리처럼 둘이 걷는 올레꾼이 제일 많았고, 혼자 걷는 올레꾼도 제법 보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는 없었다.


“코로나가 터지고서 올레꾼이 확 늘었어. 단체는 사라졌지. 개별 올레꾼만 늘었어. 두어 명이 여러 날씩 걸어. 저마다 흩어져 저마다의 길을 걸어. 모처럼 자유롭게 마음껏 숨 쉬면서.”


서 이사장 말마따나 제주올레는 코로나 사태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제주올레 26개 코스(총 길이 425㎞)를 모두 완주한 올레꾼은 2778명이었다. 2019년 1624명보다 71%나 증가했다. 무엇보다 20∼30대 청년층 완주자가 급증했다. 지난해 청년층 완주자는 539명으로 2019년(268명)보다 두 배 넘게 늘었다. 한국관광공사 조사에서는 제주올레를 비롯한 트레일이 코로나 시대 선호하는 최고 야외 관광지로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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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 못 나갔다는 청년들이 올레길을 걷고서 이렇게 말해. 코로나 때문에 우울했고 코로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올레길을 걷게 됐다고. ‘때문’에서 ‘덕분’으로 바뀌었어. 이 만큼 면역력이 생긴 거야. 길은 백신이야. 공간적 백신.”


제주도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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