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발견] 꼭꼭 숨은 성수대교 위령비, 우리 기억도 함께 봉인됐다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영화 '벌새'가 1994년을 치유하는 방식
지난달 29일 개봉한 ‘벌새’(감독 김보라)는 오묘한 영화다. 1994년이라는 아스라한 시절을 다루면서도 그 흔한 ‘복고’‘향수’ 정서가 없다. 그리워한다기보다 찬찬히 응시한다. 가족 폭력과 다툼이 식탁에 모여 앉는 횟수만큼 흔하던 그때, ‘대원외고 가고 서울대 가자’는 교사의 호령이 카세트테이프처럼 반복되던 시절. 열네살 소녀의 일상 속 작은 날갯짓을 보고 있노라면 138분간 그 뜨거웠던 여름을 다시 통과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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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추락한 버스에 언니가 타고 있지 않을까 오열하는 대치동 상가떡집 셋째 딸 은희(박지후)처럼, 관객 누구나 그날 참혹한 기억이 한 자락씩 있다.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불러준 노래 ‘잘린 손가락’마냥 뎅강 끊긴 다리와 그 아래 널브러진 차량들, 속수무책인 구조대원들. 이른 아침 등교 혹은 출근하다 숨진 학생‧시민 32명 가운데 은희 언니도, 은희도 포함될 수 있었다. 새벽녘 찾아간 한강 둔치에서 부러진 다리를 응시하는 은희의 휑한 눈빛은 떼어낸 혹처럼 잊고 있던 그 시절을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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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출근길 32명 숨져…개발사회의 민낯
흔히 ‘성수대교 붕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전체 16개 교각 중 10번·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무너져 내려앉은 사고다. 다리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해당한다.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4차선 교량으로 준공됐다. 애초 부실공사에 보수 관리가 소홀했던 데다 강남 개발 이후 강‧남북을 오가는 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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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무너진 자리만 보수해서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시민들의 불안과 반감이 컸다. 상판(도로)은 물론이고 노후화된 교각까지 전면 교체됐다. 붕괴 이듬해 4월부터 공사가 시작돼 97년 8월 차량 통행이 재개됐다. 98년 12월엔 8차선 확장 공사를 시작, 2004년 9월 최종 개통해 오늘에 이른다.
영화 속 무너진 성수대교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처리됐다. 국내 영화 특수효과 분야의 대부로 불리는 모팩(대표 장성호)이 사고 전후 성수대교 사진을 분석해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은희와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가 함께 바라보는 장면은 김보라 감독이 배우들에게 사고 당시 붕괴 지점을 일러주고 그 시선에 맞춰 촬영했다고 한다. 이들 배경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아파트는 압구정 현대 아파트다. 즉 성수대교 남단에서 북단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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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발견’이 이 장면을 주목한 것은 성수대교 붕괴 당시 대다수 사진 각도와 달라서다. 당시 부러진 단면을 위에서 찍거나 교각 아래서 촬영한 것 외에 다리 전체를 조감한 사진은 북단에서 남단 방향으로 찍은 게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리 건너 압구정동 아파트 숲이 아스라이 보이는 게 한국 사회 초고속 성장의 단면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판단 아니었을까.
게다가 우리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사진만 보았지 이렇게 무너진 다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한 화면에서 본 일이 거의 없다. 당시 우리는 은희 일행과 같은 심정으로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았고 함께 비통해했다. 25년이 지나 한 발짝 떨어져서 무너진 성수대교와 그 화면 속 사람들을 보노라면, 그사이에 벌어졌던 무수한 재난과 비극이 절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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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비극의 현장에서 묵상하는 시간
김보라 감독은 기자와 통화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1995년) 밤에 사고현장을 보러 간 적 있는데 마치 그곳에 묻힌 기억들이 말을 거는 듯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주인공들을 통해 그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새벽녘으로 설정한 것은 ‘몰래 가는 상황’이라는 개연성뿐 아니라 “완전한 아침이 오기 전의 경계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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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는 20세기 후반 초고속 개발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에도 어처구니없는 인재(人災)의 참상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겨레신문은 10월 25일 자에 시민 서정관씨를 인용해 “허리가 동강 난 성수대교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성수대교 잔해를 타임캡슐에 넣어 물려주자” “잔해를 모아 조형물을 만들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세우자” 등의 의견도 있었다. 실제 같은 해 11월 30일 수도 서울 600년을 맞아 열린 타임캡슐 매설 때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일 신문지면이 함께 들어갔다.
이와 별도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추진됐다. 위령비는 사고 발생 만 3년이 되는 1997년 10월 21일 새로 놓인 성수대교가 바라보이는 북단 한강 둔치에서 제막됐다. '분하고 원통할셔. 비명에 가신 이들 애닯다. 부실했던 양심 탓이로다' 등의 추도비문도 새겨졌다. 서울시 의뢰로 이를 쓴 이는 무학여고 국어 교사였던 시인 변세화(당시 55세)씨. 변 교사가 속한 무학여고는 당시 사고로 8명의 학생을 한꺼번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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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객 도보 접근 막는 위령비 아쉬워
이 위령비는 2012년부터 서울시가 ‘서울시 미래 유산'이란 이름으로 제정해 홍보 중인 근‧현대 일상유산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정작 찾아가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연 700만명이 찾는 서울숲 바로 인근에 있지만 자동차 전용도로인 강변북로 사이 외딴 주차장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차량으로 갈 순 있어도 대중교통이나 도보로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설립 당시만 해도 도보로 접근이 가능했지만 지난 2005년 성동구 금호동 방면에서 강변북로 진·출입을 위한 램프가 설치되면서 길이 끊겼다고 한다. 교통체계 개편 때문에 부득이했다 할지라도 여태 신호등이 딸린 횡단보도 하나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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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이라는 부제를 단 『서울 선언』(열린책들, 2018)에서 김시덕 교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위령비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121쪽 발췌).
“역시나 위령탑은 여전히 걸어서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에 관한 이 대목을, 저는 위령탑 참배에 실패한 2017년 10월20일 오전에 강변북로 진입구 옆의 벤치에 앉아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희생자였을지도 모르는 사고의 희생자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여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 사회가 ‘잊지 말자, 재발하지 않게 기억하자’고 하면서 찾지 못하게 숨겨버린 듯한 추모비가 이뿐일까. 김보라 감독은 ‘벌새’의 주인공이 성수대교로 향한 이유에 대해 “무언가를 통과하기 위해선 마주치고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담담한 추모를 위해서라도 일상에서 슬픔을 곱씹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무너진 성수대교를 영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바라보며 비로소 무언가를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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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 사소한 발견(사발)
문화 콘텐츠에서 사소한 발견을 통해 흥미로운 유래와 역사, 관련 정보를 캐고 담는 '사발'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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