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승엽처럼… 고개숙이다 한방친 일본 홈런왕 무라카미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친 무라카미를 둘러싸고 환호하는 일본 선수들. 로이터=연합뉴스 |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준결승. 한국 4번 타자 이승엽은 2-2로 맞선 8회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결승 투런포를 터트려 승리를 이끌고 눈시울을 붉혔다. 대회 내내 1할대 부진에 휩싸였지만, 자신을 믿어준 김경문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15년 뒤, WBC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홈런왕 무라카미 무네타카(23)가 9회 말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려 일본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일본은 21일(한국시간) 미국 마이애미 론디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결승에서 멕시코에 6-5 끝내기 승리를 거뒀다. 1·2회(2006, 2009년) 우승 이후 통산 세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일본은 22일 오전 8시 미국과 결승에서 맞붙는다.
2008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일본전에서 결승 홈런을 친 이승엽. 연합뉴스 |
일본은 중반까지 고전했다. 선발투수 사사키 로키(지바롯데 마린스)가 4회 초 2사 1·2루에서 루이스 유리아스(밀워키 브루어스)에게 선제 스리런포를 맞았다. 포크볼이 높게 들어가면서 장타를 허용했다. 5·6회 연속 만루 기회를 놓친 일본은 7회 2사에서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가 동점 3점 홈런을 쳐 균형을 맞췄다.
그러나 8회 믿었던 야마모토 요시노부(오릭스 버펄로스)가 무너졌다. 랜디 아로자레나(탬파베이 레이스)와 알렉스 버두고(보스턴)에게 연속 2루타를 맞았다. 멕시코는 아이작 파레데스(탬파베이)의 적시타로 5-3, 두 점 차까지 달아났다. 일본은 8회 말 야마카와 호타카(세이부 라이온스)의 희생플라이로 4-5를 만들었다.
일본은 9회 말 선두타자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가 2루타를 쳤고, 요시다가 볼넷으로 걸어나갔다. 무사 1·2루. 마지막 순간의 주인공은 무라카미였다. 무라카미는 멕시코 마무리투수 지오바니 가예고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빠른공을 받아쳐 중견수 키를 넘겼다. 타구는 담장을 맞고 나왔고, 2루주자 오타니와 1루에 있던 대주자 슈토 우쿄가 홈을 밟았다. 6-5 끝내기 역전 2루타.
무라카미는 일본이 자랑하는 홈런타자다. 지난 시즌 56홈런을 쳐 1964년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세운 일본인 타자 단일 시즌 최다기록을 세웠다.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블라디미르 발렌틴·60홈런) 도전엔 실패했지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003년 이승엽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 세운 아시아인 최다 홈런 기록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무라카미(村上)가 타격의 신(神)처럼 잘 친다고 해서 음이 같은 한자를 써 '무라카미(村神)'로 표현되기도 했다.
무라카미 무네타카. 뉴스1 |
그러나 이번 대회에선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한·일전을 포함해 초반엔 4번타자로 기용됐으나 좀처럼 타격감을 끌어올리지 못해 타순도 5번으로 내려갔다. 전날 경기까지 기록은 17타수 4안타(타율 0.235). 기대했던 홈런은 하나도 없었다. 이날 경기에서도 마지막 타석 전까지 삼진 3개 포함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그러나 무사 1·2루 찬스에서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은 번트 대신 강공을 지시했고, 무라카미는 기대에 부응했다. 이날 공휴일(춘분절)이라 중계방송을 지켜봤던 일본 열도는 무라카미의 부활에 떠나갈 듯 했다. 무라카미는 구리야마 감독을 끌어안고 기쁨을 누렸다. 구리야마 감독은 "세계를 놀라게 할 타자라고 믿어왔다"고 했다.
무라카미는 경기 뒤 "몇 번이나 삼진을 당하고 몇 번이나 분했다. 대단한 팀 동료들이 도와준 덕분에 마지막 타석에 설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번트가 머리 속에 떠오르긴 했다"며 "홈런이 아닌 걸 알았지만, 주자가 (발빠른)슈토여서 끝내기가 됐다. 안타는 내가 쳤지만 정말로 팀 전체가 거둔 승리라고 생각한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은 "(무라카미가)정말 부진했는데 중요할 때 하나를 쳐줬다. 일본의 결승 진출을 보면서 우리도 좋은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