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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이병헌은 '다모' 애청자···김정은도 못 말리는 北한류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북한 주민 일상에 한류 콘텐트 '불시착'


“어이, 뀨띠뿌띠”


“네!”


“네래 다모 봤어?”


“뭐요?”


“남주산(남조선) 드라마 다모. 내래 마지막회를 못봤어. 수용소 있는 동안 궁금해 죽는줄 알았지 뭐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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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 관객을 향해 질주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백두산’에서 북한 요원 리준평(이병헌)과 남측 특전사 EOD(폭발물처리반) 대위 조인창(하정우)이 처음으로 나누는 사적인 대화다.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을 막기 위한 특수작전에 투입된 하정우가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자원 이병헌을 이용하려다 되레 그의 꾀에 넘어간 상황. 하정우를 장갑차 안에 수갑 채워둔 채 이병헌이 소변보며 건네는 질문이 ‘다모 결말을 아느냐’다.


분초를 다투는 위기 속에 느닷없는 이병헌의 물음도 관객의 허를 찌르지만 왜 하필 ‘다모’일까. 조인창도 의아했는지 “이준평씨 스타일은 ‘대장금’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근데 그거보다 ‘별그대’ 더 재미있다고 사람들이 얘기 많이 하더라고요”하고 답한다. 정작 자신은 ‘미드(미국드라마)’만 본다면서 말이다. 이해준‧김병서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둘 다 좋아하던 작품이기도 했고, 인창이 별그대, 미드를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뭐야?’ 싶을 정도로 철 지난 느낌의 드라마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소한 발견’이 주목한 북한인의 한류 사랑은 이뿐 아니다. 현빈이 북한 엘리트 장교이자 총정치국장의 아들 리정혁으로 나오는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도 비슷한 묘사가 나온다. 첫 회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북측 비무장지대(DMZ)에 불시착한 손예진(윤세리 역)이 도주할 때 초소 경계를 서던 북한 병사 김주먹(유수빈)은 ‘천국의 계단’을 보며 눈물짓느라 그를 놓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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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에선 김주먹이 “남조선 드라마에선 급박한 상황에 남녀가 별안간 끌어안든지 입을 맞춘다“면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 남조선만의 방법”이라고 설명하는 대목도 있다. 그 말처럼 북한군에게 들킬 위기에 처한 현빈은 손예진에게 키스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남조선 드라마를 보면 누군가 쫓아오거나 위기 상황이 오면 쓰는 굉장한 방법이 있다던데…(중략). 처음에 얘길 들었을 때는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막상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소…”


김주먹이 남한 드라마 봤다고 처벌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데서 보이듯 북한 당국은 한국 대중문화를 ‘날라리풍’에 ‘자본주의 황색 바람’으로 규정하고 주민들이 접하는 걸 엄격 금지한다. 하지만 탈북민들 증언에 따르면 적지 않은 민간인‧군인들이 한국 드라마‧영화‧음악에 빠져있다고 한다. 2017년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북한 군인도 회복 단계에서 걸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지(Gee)’를 즐겨들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19년 전 이병헌이 병장 이수혁으로 출연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 땐 달랐다. 영화 전반부에서 수색 도중 지뢰를 밟아 대열에서 낙오된 이병헌은 북한군 송강호(오경필 역)와 신하균(정우진 역) 덕에 목숨을 건진 뒤 북측 초소를 들락거리며 우정을 쌓는다. 이때 함께 건너간 김태우(남성식 역)가 애인 사진이랍시고 지갑에서 꺼내 보여주는 게 고소영 사진. 송강호‧신하균이 멋모르고 “우와~”하는데 이병헌이 김태우를 흘겨보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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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들이 당대 톱스타 고소영을 일개 병사 여자친구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 상황을 잘 몰랐다는 설정이다. 바로 전 해엔 한석규‧최민식 주연 ‘쉬리’(1999)가 남북 갈등 극화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바 있다. 그 흐름에서 나온 ‘JSA’는 영상물등급심의 때 원래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제작사 명필름 관계자는 “반공 교육 관점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면서 “다행히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재심 때 15세 관람가를 받았다”고 돌아봤다. 남도, 북도, 서로 실체 알기를 꺼리던 시절 얘기다.


‘백두산’이 ‘다모’를, ‘사랑의 불시착’이 ‘천국의 계단’을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북한에 한국 콘텐트가 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경제가 붕괴하고 2000년대 들어 탈북 행렬이 급증하면서다. 북-중, 북-러 접경지대가 고리가 됐다. ‘다모’(2003)와 ‘천국의 계단’(2003~2004)은 ‘대장금’(2003~2004)과 함께 불법 복제 DVD가 가장 많이 돌았던 한류 대표작이다. 영화에선 입수 경로가 안 나오지만 극중 이병헌이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점으로 미뤄볼 때 국경을 넘나들며 영상물을 얻었을 개연성이 크다.


“조선(북한)에 있으면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처럼 해외에 나와서 알게 되는 거지요.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도 봤어요. 태영호 공사 나와서 말하는 것도 봤지요.”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최근 ‘충성의 외화벌이’로 불리는 북한 출신 러시아 파견 노동자들을 취재한 르포 저서 『러시아에서 분단을 만났습니다』(너나드리, 2019) 속 한 북한노동자의 증언이다. 그는 유엔 제재로 인한 본국 귀환에 맞춰 짐을 부치면서 128기가 용량의 USB에 50부작 영화를 담아보냈다고 털어놨다. 러시아 숙소에서 시청한 남한 드라마 중에 ‘기황후’ ‘하늘이시여’는 중간부터 봐서 전체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는 얘기도 했다. 이들이 자주 찾는 중국시장 상점엔 아예 ‘한국영화’라는 안내문구 하에 ‘아이리스’ ‘개와 늑대의 시간’ ‘주몽’ 등 인기영상물이 한글 타이틀 그대로 진열돼 있다고 강 교수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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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북한에 유입된 한국 콘텐트는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들어갔다. ‘사랑의 불시착’에 묘사된 것처럼 북한에선 숙박검열과 같은 불시 단속이 수시로 이뤄진다. 한 탈북민은 “단속원이 갑자기 전기를 내려버리면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는 상태에서 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딱 걸렸다”고 회고했다. CD 시대를 지나서 요즘은 USB가 대세다. 크기가 작아서 숨기기 쉽다. 요즘은 ‘스텔스 USB’라고 불리는 위장 USB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처음 꽂을 땐 아무 것도 없는 공기기 상태로 보이다가 여러 차례 넣으면 내용물이 보이게끔 해 단속을 피한단다.


이같은 ‘괴뢰 문물’(북한에서 남측 문물을 가리켜 부르는 말)의 확산은 이제 북한 당국의 통제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 등이 북한 당국의 사상 지침서를 입수‧분석한 논문 '북한 군대 내 남한 영상물 시청 실태 및 북한 정권의 대응'(2015)에 따르면 영상물을 시청하다 적발된 사례는 인민무력부 지휘부 소속 군인과 부관, 총참모부 지휘정보국 직속 부대 군인 등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유통 매체도 CD, 외장하드, USB, DVD, 노트형 컴퓨터, 티카드(T-Flash card), 손전화(휴대폰), 가정 내 TV, 소형 TV, 자체 조립 라지오(라디오) 등으로 다앙하다. 장마당에서 인기리에 거래되는 데다 뇌물로 인한 봐주기 현상도 극심하다. 드라마 ‘스파이 명월’(2011)에서 북한 고위간부 딸이 한류스타 강우(에릭)에게 빠져서 싱가포르 공연까지 찾아간다는 설정이 영 허튼 게 아니란 얘기다.


외부 정보 접촉이 제한된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는 그들이 한국의 발전상과 자본주의의 실체를 짚어볼 수 있는 창이다. 숫자는 점점 늘고 있다. 국내 입국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연례 연구 조사에 따르면 2016년의 경우 10명 중 8명(88%)이 북한에 있을 때 한국 영상물을 접한 적 있다고 한다. 한류를 접하지 못했다는 응답자도 2011년 24%였다가 2016년 조사 땐 11%로 낮아졌다. 2016년 망명·귀순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는 "북한에서 한국 영화·드라마를 많이 봐서 (젊은이들) 말투도 변했다"면서 "연애할 때 ‘자기야’ ‘오빠야’ ‘할거야?’ 등 북한에 전혀 없던 표현들을 쓴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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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식 선군 정치가 서슬 퍼런 상황에서 북한 내 은밀한 한류가 정치·사회 변화를 끌어낼 거란 기대는 성급하다. 그럼에도 ‘다모’나 ‘천국의 계단’ 결말이 궁금해 치근대는 북한 주민이 있단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명필름 관계자는 “세월이 한참 지난 뒤 탈북민들로부터 들었는데 ‘쉬리’보단 ‘JSA’ 속 북한인 묘사가 훨씬 실제와 가깝다고 하더라”고 했다. 당시 한국에선 북측을 너무 인간적으로 그렸다며 퇴역 군인들이 영화사에 몰려가 항의하는 일도 있었는데 말이다. ‘백두산’이나 ‘사랑의 불시착’을 북한인들이 보게 되면 뭐라고 할까.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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