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돌 해녀 … 2만개 불꽃으로 피어난 제주 오름
세계적 조명예술가 브루스 먼로
2만㎡ 땅을 ‘빛의 들판’으로 꾸며
“우리는 자연에서 듣는 법 배워야”
페트병으로 완성한 ‘워터 타워’도
아이 넷 둔 가장, 마흔에 작품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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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처럼 깜빡이는 거대한 규모의 빛무리는 ‘빛의 풍경화가’라 불리는 영국 조명 예술가 브루스 먼로(59)의 설치작품 ‘오름’. 1만9800㎡(6000평) 대지를 수놓은 이 작품은 27일 개막하는 제주 조명예술축제(LAF·라이트 아트 페스타)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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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아트 분야에서 ‘거장’으로 불리는 그가 제주 전시에 앞서 서울서 먼저 만났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흔이 될 때까지는 네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 역할에 매달리느라 내 작품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조명 디스플레이 전문가로 일해온 그는 “199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마음이 이끄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며 “내가 잘 아는 재료로 내가 느끼고 생각해온 것들을 많은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하며 표현하는 일이 즐겁다”고 덧붙였다.
그의 작업은 두 가지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풍경(landscape)과 빛(light)이다. 대표작도 ‘빛의 들판’(Field of Light)이다. 광섬유, 유리, 아크릴, LED 등의 소재로 빛으로 일렁이는 줄기를 만들어 마치 농부처럼 대지에 심어왔다. ‘오름’을 가리켜 그는 “제주에서 영감을 받아 재현한 새로운 버전의 ‘빛의 들판’”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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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빛의 들판’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
A : “1992년 아내와 함께 호주를 여행하다가 울룰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는 곳인데, 그때 느낀 감정을 잊을 수 없다. 항상 갖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풍경이 주는 느낌을 적었다. 나는 풍경 안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믿는데, 친구들은 이런 내가 미쳤다고 하더라(웃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울룰루에서 느낀 것을 작품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Q : 제주에서 받은 느낌은 달랐을 것 같다.
A : “4년 전 작품 제안을 받았고, 이후 여러 차례 제주를 방문했다. 바람과 돌, 그리고 해녀 등 제주의 많은 것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제주의 오름은 내가 오래전 울룰루에서 느낀 감정을 떠오르게 했다. 나이 들수록 나는 풍경으로부터 듣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주위의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오름’에 심어진 것은 광섬유와 아크릴, LED 조명으로 만들어진 2만1500개의 줄기다. 가까이서 보면 풀처럼 가느다란 투명 막대기에 꽃송이처럼 전구가 달려 있다. 그는 이 줄기를 마치 오름을 닮은 듯한 원형으로 나눠 심어 빛무리를 완성했다.
Q : 자연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란.
A : “나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으면서도 내가 존재하는 것을 충만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특정한 장소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 그곳은 바닷가일 수도 있고, 도시의 거리일 수도, 공원의 벤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런 순간에 주위의 것들이 내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순간을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
Q : ‘오름’은 또 하나의 자연처럼 보인다.
A : “여러 해 동안 작업해오며 소재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법을 배우게 됐다. 또 거대한 규모로 반복되는 형식이 그 자체로 유기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연에서 느껴온 게 이렇게 표현된 게 아닐까 싶다.”
Q : 작품을 설치하며 특히 신경 쓰는 점은.
A :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밤하늘의 별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 정도다. 밤에 보이는 작품인 만큼 최대한 달빛이나 별빛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톤을 낮추고 조율한다.”
수많은 페트병으로 만든 ‘워터 타워’도 이번 전시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들판에 세워진 39개의 기둥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빛과 웅장한 합창곡이 관람객을 오래 서성이게 한다. 그는 “각 기둥은 다양한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라며 “세상을 치유하는 빛의 합창곡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Q : 작가로서 데뷔는 늦은 편이다.
A :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고,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싶어 할 것이라는 자신도 없었다. 나중에 돈을 모은 후에야 위험을 감수해볼 작정으로 내 작품을 만들어봤다. 첫 작품을 완성한 뒤 평생 남은 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아내와 함께 제주 현장을 찾은 그는 “내 작품은 봐야 하는 게 아니라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며 “관람객들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 비로소 내 작품이 완성될 것”이라며 웃었다.
제주=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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