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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미술관을 찍었다, 시간의 강물이 보였다

독일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 개인전

극장·박물관 등 내부 풍경에 집중

사람 전혀 없는 공간의 묘한 긴장

“건축물은 그 자체가 프레임이다”

압도적 화면과 현미경 같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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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 박물관, 오페라 극장, 도서관 등 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거대한 규모의 공공 공간을 주로 찍었는데도 그렇다. 큰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것은 벽과 기둥, 천장과 바닥, 그곳에 새겨진 화려한 장식,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테이블과 서가, 빽빽이 꽂힌 책들이나 텅 빈 좌석들이다. 그런데 명징하고, 팽팽하게 균형 잡혀 보이는 이미지가 매우 압도적이다. 종교적인 감흥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다.

지난 50여 년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온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74)의 작품들이다. 작가가 포착한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는 풍부한 디테일을 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은 없지만, 그곳에 깃든 사람과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만의 방식이다.


회퍼의 개인전 ‘깨달음의 공간’(Spaces of Enlightenment)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2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 네 번째로 열리는 그의 전시로, 1990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촬영한 작품 총 21점을 선보인다.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극장을 비롯해 프랑스 국립도서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비롯해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의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 등의 내부 공간을 찍은 사진들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이런 공간들이 늘 나를 설레게 한다”며 “사람 없는 공간이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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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1980년대부터 도서관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의 내부 공간을 찍어왔는데.




A : “내가 생각하기에 내부 공간과 사진이라는 매체는 매우 이상적인 조합이다. 건축물의 내부 공간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프레임을 갖고 있고, 이 안에 특유의 구조와 질서가 있다. 빛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건축물은 그 자체가 문화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이고,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번 전시 제목 ‘깨달음의 공간’인 것도 이런 장소들의 특징을 함축한다. 김정연 국제갤러리 큐레이터는 “회퍼가 즐겨 찍는 공간들은 사람들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인식의 변화를 일깨운 사회적 장소들”이라며 “이곳들은 지식의 확장을 넘어서 성찰과 깨달음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보여주는 공간들로 읽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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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런데 작품 안에 사람이 없다.




A : “사람 없이 찍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다. 둘째는 사람들이 없을 때 비로소 그 공간을 풍부하게 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물 안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무엇이 사람들과 공간을 관계 맺게 하는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없는 공간은 우리가 공간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살펴보게 한다.”


회퍼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 없는 공간 사진을 집주인이 빠진 저녁 식사에 비유해 설명한 바 있다. “식사 자리에서 중요한 누군가 빠져 있으면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Q : 왜 공간인가.




A : “사진 작업을 하던 초기에는 사람들을 찍었다. 과거에 나는 독일에 사는 터키 노동자들이 독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 있었다. 그때 터키 이주민들 집에서 촬영했는데, 그런 작업이 내겐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허락을 받고 들어갔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당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와 미적 감각에 따라 사는 장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공간과 인간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깊이 느꼈다.”




Q : 그런데 플래시를 쓰지 않고 작업한다고.




A : “공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빛이다. 하지만 촬영할 때 따로 조명을 준비하진 않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든, 아니면 그곳의 인공조명이든 장소 자체에 있는 빛으로만 작업한다. 그래서 사진 찍을 공간을 탐색하고, 특히 빛의 효과를 테스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Q : 굳이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A : “그곳에 원래 있지 않은 빛을 더해 이미지를 과장해서 극적인 효과를 내고 싶지 않다. 조명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그 장소에 놓인 것들도 건드리지 않는다. 이미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회퍼는 1944년 베를린 근교 에베르스발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가져 19세에 광고·건축·패션 사진을 다루는 사진 아틀리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한 뒤, 76년부터 현대 독일 사진을 이끈 베른트 베허(1931~2007)가 개설한 사진학과에서 수학했다. 토마스 스투르트, 토마스 루프,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등과 더불어 ‘베허 학파’ 1세대로 불린다. 베어 학파는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반복적으로 배열된 대상을 통해 어떤 유형을 드러내는 ‘유형학적 사진’으로 유명하다.


미술평론가인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는 회퍼의 작품을 ‘역설’(paradox)이란 키워드로 압축했다. 강 교수는 “회퍼가 찍은 공간들은 대부분 유럽의 대표적인 건축문화유산”이라며 “그는 물리적인 공간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정신문화, 인문예술의 우주를 응축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어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차원에서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스케일과 마이크로한 디테일의 조합이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관조하고 성찰하게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26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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