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14세女 20분간 소주 한병" 법원 왜 檢불기소 뒤집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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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판결-다시보기
시작은 ‘임신테스트기’ 였습니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10대 딸의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하고 딸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딸 A양(당시 14세)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선배였던 B군(당시 15세)과 술을 마시다 취한 딸이 성폭행(준강간)을 당했던 겁니다.
하지만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범죄 혐의를 충분히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냅니다. B군이 끝까지 “스킨십은 있었지만 성관계는 없었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는 성범죄 사건에 능하다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직접 법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난 14일 서울고법의 재정사건 전담부인 형사31부(재판장 김필곤)는 아버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올해 초 재정 사건만 맡는 전담부가 생기고 성폭력 범죄에 공소 제기 결정이 난 건 이 사건이 처음입니다. 한 사건을 두고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완전히 바뀐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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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간 소주 1병, 그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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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량이 5병인데 넌 몇 병이니”
사건 며칠 전 B군은 A양에게 메시지로 주량을 물었습니다. A양은 1병이라 답했습니다. 그런데 B군은 A양에게 내기를 제안합니다. 누가 술을 잘 마시는지 내기를 하잔 겁니다. B군은 A양을 집으로 초대했고 술 내기가 시작됐습니다.
약 20여분 만에 두 사람은 소주 1병과 1/4병 정도를 각각 마십니다. A양은 당시를 "정신이 혼미하고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라고 기억합니다. B군은 A양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갑니다. 여기서부터 A양과 B군의 진술이 달라집니다.
A양은 “성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B군은 “스킨십을 하고 성관계를 시도했지만 A양이 어떤 거부표현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B군은 "당시 성관계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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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왜 B군에게 혐의가 없다고 봤을까
검찰은 B군 말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사건 이후 A양은 스스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B군의 집 밖으로 나옵니다. 검찰은 A양의 상태가 '항거불능'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사건 전후 A양과 B군이 주고받은 메시지에도 주목했습니다. 사건 전 사건 전 B군은 술내기와 스킨십을 예견 할 수 있는 메시지를 A양에게 보냈습니다. 사건 이후 A양은 ‘나쁘시끼(나쁜새끼)'라는 메시지를 B군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일상적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따로 B군에게 항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A양이 어머니와 친구에게 "성관계가 있었다"고는 털어놨지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사건을 알고 나서야 신고에 이르게된 점도 고려했습니다. 검찰은 “A양 진술만으로는 B군의 피의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증거가 없다”며 불기소 이유를 밝혔습니다.
A양 측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A양이 스스로 엘리베이터를 타긴 했지만 그 뒤 술에 못 이겨 구토를 하고 넘어지는데 왜 이런 부분은 항거불능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지 않냐는 겁니다.
A양이 B군에게 ‘나쁘시끼’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도 설명했습니다. 법을 잘 몰랐던 A양은 B군의 행동을 막연하게 '나쁜 일'로만 생각했지 '성폭행'으로는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심각한 폭행이나 협박이 동반돼야 성폭행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자신처럼 술에 만취한 사람의 뜻에 반해 성관계를 하는 것(준강간)도 범죄가 되는지 잘 몰랐다는 겁니다. 처음에 신고를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고 경찰관인 아버지는 법을 잘 알았기에 신고할 수 있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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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전담부 "검찰 무혐의 판단 잘못, 재판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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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군은 범죄 혐의가 없다"는 검찰과 "B군의 잘못을 재판을 열어 판단해달라"고 호소하는 A양 측. 법원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잘못됐다고 판단했습니다. CCTV 화면으로 보이는 A양의 상태나 두 사람의 관계, A양이 B군 집에 가게 된 사정 등을 살펴볼 때 A양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또 당초 검찰은 B군에게 형법상 준강간죄를 적용했지만, 법원은 아동ㆍ청소년성보호법상 준강간을 적용해 재판을 시작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검찰 출신의 이승혜 변호사는 “검찰이 아동·청소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성인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변호사는 “당시 14세였던 A양이 20분간 소주 한 병을 넘게 마셨다면 만취 상태로 보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데 항거불능을 너무 좁게 해석한 것 같다”고 짚었습니다.
서울고법의 공소 제기 결정으로 A양은 B군의 죄를 재판에서 다퉈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렵게 시작된 재판에서 B군이 정말 유죄 판결을 받게 될지, 재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게 될지 아직 예측은 어렵습니다. 제대로된 유·무죄를 가리는 건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6개월이 흐른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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