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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꿈꾸는 93세 송해 “난 맨날 청춘, 드라마도 해보고 싶어”

"정주영 회장이 내게 그랬지

사람 많이 아는 내가 제일 부자라고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게 가족이야

먼저 떠난 아들 자작곡 듣고 울었지"


다큐 '송해 1927' 부산영화제 초청

소탈한 웃음 뒤 질곡의 개인사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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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는 아픔이란 게 당해보지 않은 분은 모르죠. 이제 눈물도 마를 때가 됐고 한숨도 굳을 때가 됐는데 하염없다 하는 게 눈물인가 봐요.”


1927년생 최고령 현역 연예인이자, 음악 경연 프로 ‘전국노래자랑’(KBS1)을 33년째 진행해온 국민 MC 송해. 그가 34년 전 스물둘 꽃다운 나이로 떠나보낸 아들을 눈물로 회고했다. 22일 서울 낙원동 ‘원로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1년간 자신의 삶을 담은 첫 다큐멘터리 ‘송해 1927’(감독 윤재호)을 찍으며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의 자작곡을 처음 들었다고 한다. 다큐 제안을 받았을 땐 “가족 얘기라고 아픈 것밖에 없고, 주저했다”는 그가 “내 속에 담았던 걸 한번 얘기할 때도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생각에 마음을 돌려 만든 다큐다. 이 다큐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돼 26일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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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오토바이를 타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고(故) 송창진 씨는 가수의 길을 반대하던 아버지 몰래 자작곡 녹음테이프를 4집까지 남겼다. 당시 KBS 라디오 방송 ‘가로수를 누비며’로 큰 인기를 누리던 송해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 17년간 맡아온 진행 자리에서 하차했다. 막내딸 숙연씨가 차마 아버지한테 말 못하고 간직해온 노래들이 이번 다큐 제작진에 의해 세상의 빛을 봤다.


“왜 이걸 맘 놓고 나에게 들려주게 하질 않았나. 내가 왜 좀 이해를 못 했는가” 한탄했다. 음악 욕심에 고향 이북 해주예술학교 성악과까지 나온 그가 아들 마음을 왜 몰라줬을까. 그는 “나도 딴따라 한다고 아버지한테 쫓겨나도 봤고 내가 너무 어렵게 넘어온 길이라 더 말렸다”며 주름진 눈시울을 적셨다. “전국~ 노래자랑!” 일요일 안방극장 활력소가 됐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한국 희극인 1세대다. 황해도 재령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1ㆍ4후퇴 피란 통에 홀로 월남, 부모님·형·여동생과 생이별했다. 본명이 송복희인 그가 ‘송해’란 이름을 얻은 것도 피란길에서다.


“피란길은 미어지지, ‘쌕쌕이’(전투기)가 막 갈겨서 옆에서 사람들은 넘어지지. 얼마나 끔찍합니까. 연평도에서 3000명이 화물선을 탔는데, 어디 방향도 없는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어요.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이름이 뭐야, 하기에 ‘바다 해(海)’를 붙여 ‘복’자 빼고 ‘송해’. 지금까지 내 이름이 됐어요.”


휴전 이후 그는 유랑 악극단을 시작으로 라디오ㆍTV 무대를 넘나들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다. 지금도 자신을 “38 따라지, 딴따라, 세상에서 제일 센 애주가”라 소개하는 호쾌한 익살꾼이지만 그 웃음 뒤엔 가슴 아픈 개인사도 두텁게 쌓였다. 아들을 한순간에 잃곤 “청소하다 걔 양말 짝 하나 나오면 또 붙들고 한나절” 울곤 했다는 아내 석옥이 여사는 2018년 독감으로 부부가 나란히 입원했다가 홀로 세상을 떠났다.


“부부란 게 맺는 걸 같이 맺어도 떠나는 건 같이 못 떠나는 것 아녜요. 알면서 야속한 거지. 햐, 이런 아픔이 있나. 부모님도 원망해봤어. 하소연도 해보고. 그러고 나서 혼자 껄껄 웃고 또 내가 갈 길이 있다, 애들이 있다, 손주놈이 있다. 이러곤 정신 차리고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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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딸과 5~20분 거리에 산다. 그런 숨결이 아니면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털어놓으며 가족의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이 세상 제일 부자가 사람 많이 아는 송해라고 돌아가신 정주영(전 현대그룹 회장)씨가 말했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게 가족”이라며 “그래서 ‘전국노래자랑’ 에서도 ‘전국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인사한다”고 말했다.


88년 5월 경북 성주 편부터 자리를 지킨 ‘전국노래자랑’을 두고 그는 “내 평생의 소중한 교과서”라고 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세 살짜리한테도 배울 게 있다는 걸 실제로 느낀다”면서 “참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올 초 감기로 입원해 ‘전국노래자랑’ 녹화를 건너뛰었을 땐 그의 이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는 “건강이란 것도 내가 하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며 건강 비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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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장 이루고픈 꿈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고향 황해도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찍는 것. 그는 2003년 8월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에서 북한 진행자 전성희와 공동 사회를 본 광복절 특집 ‘평양노래자랑’ 이야기를 꺼내며 “이후 개성·원산 등을 다 돌자고 약속하고 왔는데 무산됐다. 올해 4월에도 급계획이 있다가 하노이 회담 가면서 깨졌다”고 했다.


“내 고향 재령이 곡창입니다. 구월산 앞에 큼직하게 야단법석 차려놓고 ‘고향 계신 여러분 송해가 왔습니다’ 하는 게 소원이에요. 이제 1000만 이산가족 중 3만 명도 안 남았습니다. 나머지라도 가족하고 단 하루라도 따뜻하게 솥에 밥 해 먹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의 또 하나의 꿈은 뜻밖에 드라마 배우다. “드라마 보면서 내가 하면 이렇게 한번 해볼 텐데, 해요. 조금 늦긴 했지만. 아니, 나이라는 게 숫자에 불과한 거 아니오? 나이야 가라, 하면 간 거야. 나는 맨날 청춘이요.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아주 편안해요. 마음이 편안하면 잘 안 늙어.”


그는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참 답답하고 어려운데 이게 한번 지나가고 나면 이것보다 더 큰 게 올 때 이길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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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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