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도 잘 놀자 …안 쓰고 안 먹는 옛날식 청빈은 싫다
더,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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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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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 황인용씨 사회로 3대, 4대에 걸친 대가족이 나와서 웃어른을 중심으로 무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 솜씨도 뽐냈다. 대가족 시대라 일흔 넘은 노인께서 출연하면 20~30명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앞뒤로 가득했다.
가끔 여든이 넘은 경우 자식들이 부축해서 나오고 사회자도 아기한테 말 걸듯 조심조심 다정하게 인터뷰했다. 시청자들은 ‘정말 복 많은 어른’이라고 했다. 평균수명이 낮고 전쟁과 궁핍을 겪고 난 때라 어른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고, 오래 산 것 자체가 미덕이고 존경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세대가 노인을 성가시게 생각한다. 노인 비하와 혐오도 심하다. 왜 연장자가 존경받지 못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노인이 너무 많고 예전보다 건강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한정된 자원을 축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결혼이나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나중엔 지금 노인들보다 훨씬 더 다음 세대의 등골을 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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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존경 요소도 나이보다 후천적 결과물(인격, 지식, 돈, 지위…)로 변하는 것 같다. 노인들의 경험도 더는 사회적 자원이 아니다.
노인이라는 개념도 혼란스럽다. 65세면 신체적 활력이 있는 나이인데 직장은 없고 지하철은 무료다. 그것도 도시 이야기이고, 시골에서는 ‘청년’이다. 회사에서는 50세 넘으면 거의 최연장자라 그런지 아예 40대 후반부터는 사무실에서 꾸벅거리고 졸며 늙은 행세에 들어간다.
그러니 어디까지 젊음이고, 어디부터 늙음인지도 모르겠다. 잘만 하면 평생 ‘젊음’의 카테고리에서 살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현명하고 즐거운 일이다.
나는 52세다. 젊음과 늙음의 중간이고, 당연히 노인 세대를 향해 진행 중이다. 내 블로그에서 12년 전에 썼던 ‘노후에 대비하여’란 글을 찾아냈다. 그때부터 벌써 나의 주 종목인 ‘은퇴 후 잘 놀기’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있다. 2007년 글을 한번 보자.
■ 노후에 대비하여
여유가 있든 없든, 노인끼리 사는 집은 어둡고 춥다. 벽에는 손자들 사진, 뭔가 끓이거나 말리고 있는 냄새… 식사도 반찬 두어 개로 대충 드시다가 자식들 올 때 되면 집안을 후다닥 치우고 예전에 좋아하던 별식 차려놓고 기다리신다. 본가도 그렇고, 처가도 그렇고, 교장이던 외삼촌댁도 그럴 것이고, 대학 총장까지 지냈다던 친구 아버지댁도 그렇단다.
평생 몸에 밴 검소함이 노령의 몸놀림과 더해져 더욱 궁색해 보인다. 빈방의 전등 하나에도 벌벌 떨며 그저 '안 쓰고 안 먹는' 옛날식 청빈을 보면서 부모님 세대와의 처연한 단절감을 느낀다.
나도 그렇게 되겠지. 늙으면 뭘 하고 살까. 대부분 노후준비를 '경제문제'로만 생각한다. 경제적 대비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건 문화적 대비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기력 없고, 남들이 내게 별 기대를 안 하는 상황…. 젊은 사람 귀찮게 하지 않고 내 인생을 푸짐하고 즐겁게 보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노후에 터득하기 쉽지 않으니 지금부터 '노는 법', '노후에 잘 사는 법'을 미리 정리해놔야 한다. 원래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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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 노래를 잘해야 한다.
- 여행도 기술이 필요하다. 세상을 처음 접한 아이의 눈빛과 호기심을 발산해야 한다.
- 봉사활동도 미리 준비해야 가능하다. 다들 호언하지만 감각 좋고 팔팔하던 시절에도 안 하던 봉사를 노년에 하게 될 리 없다. 자신 있는 분야의 매뉴얼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
- 진중하게 붙어 앉아 글을 써야 한다. 여행, 봉사, 음악, 그림 속에서 받은 감흥을 기록하여 감정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야 그 분야에 대한 몰입과 발전이 있다.
- 지방에서 살아야 한다. 낯선 곳에서의 경험과 약간의 스트레스는 적당한 자극이 되어 정신건강에 좋다.
- 생활환경이 깨끗해야 한다. 차림새, 주거 등 모든 면에서 구식의 티를 벗고 윤이 나도록 깔끔하게 살아야 젊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 준다. 아주 작은 집에서 최소한으로, 그러나 첨단 네트워크로 살아야지.
- 매력 있어야 한다. 유머감각과 말주변이 있고, 눈치가 빨라야 한다.
- 자식들을 멀리해야 한다. 가까이 있으면 종속되거나 의존하기 쉽다.
- 강건해야 한다. 내 시대에 맞는 내 자존심을 지킨다. 노인은 어차피 완강하고 보수적이며 고집 세다. 왜 나이든 연기자가 젊은이들 시트콤에 나와서 오버연기를 하며 발버둥치는가?
나는 삶에 대한 집중력은 놓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고 감각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2007.1.10)
이 다짐대로 되어가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지만 마흔에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다. 특히 작년부터 '더,오래'와 인연이 닿아 노후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 터라 12년 전에 남긴 기록이 좋은 자료가 된다.
요즘 최고의 욕이 “유병장수하라”다. 건강이 행복의 선결조건, 나 역시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다. 그런데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생을 마치는 날까지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가다듬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누구든지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기 바란다. 장수 만세!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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