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놀고먹고 할배’ 서포 김만중이 잠든 섬 속의 섬 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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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섬인데 이름에 섬이 없다. 남해섬도 아니고 남해도도 아니다. 그냥 남해라 부른다. 이 남해 앞바다에 노도(櫓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 옛날에 섬에서 노를 만들어 노도가 됐다고 한다. 현재 12가구 17명이 거주한다.
노도는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유배처였다. 서포는 1689년 3월 노도로 유배 내려와 1692년 4월 섬에서 죽었다(음력 기준). 섬 곳곳에 아직도 서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 들어 남해군이 150여 억원을 들여 노도 문학의 섬 사업을 진행했다. 서포가 머물렀다는 터에 초옥을 재현했고, 문학관과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김만중 문학관은 완공되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개장을 미뤘다. 서포의 마지막 거처에서 그의 기구했던 삶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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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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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는 광산 김씨다. 집안 내력이 화려하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김장생(1548~1631)이고 큰할아버지가 김집(1574~1656)이다. 부자 모두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잡은 대학자로 나란히 문묘에 배향돼 있다. 동국 18현에 종사된 유일한 부자 사례다. 서포는 김장생의 둘째 아들 김반(1580∼1640)의 손자이자 김익겸(1615∼1637)의 아들이다. 이 부자는 병자호란의 참상을 경험했다. 김반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치의 현장을 지켰고, 아들 김익겸은 난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갔다.
‘섬에 상륙한 청병은 강화산성으로 향했다. 강화 감찰사 김경징은 배를 내어 달아났다. 피란민들이 성첩을 지켰다. 늙은 원임 대신 김상용이 싸움을 지휘했다. 동쪽 성문이 깨지면서 청병이 몰려들어왔다. 청병은 성첩을 돌며 청소하듯 도륙해 나갔다. 김상용은 쫓기면서 남문 문루 위로 올라갔다. 김상용이 화약더미에 불을 붙였다. 문루가 무너져 내렸고, 김상용의 육신이 흩어졌다.’ - 김훈, 『남한산성』, 331∼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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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남한산성』의 막바지 대목을 옮겼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김상용은 폭약을 터뜨려 자결했다. 김상용은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마지막까지 대립했던 척화파 김상헌의 형이다. 김훈은 소설에서 김상용의 죽음만 기록했지만, 성벽과 함께 스러진 일흔일곱 살 원로 곁에는 스물세 살 청년도 있었다. 그가 김익겸이다.
역사는 정치가의 순국만 기억할 뿐,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다루지 않는다. 김익겸이 죽을 때 아내 해평 윤씨(1617∼1689)는 만삭이었다. 남편이 죽고 며칠 뒤 아내는 강화도 피란민을 태운 배 위에서 남자아이를 해산했다. 그 유복자가 김만중이다. 배에서 태어났다 하여 서포의 어릴 적 이름이 ‘선생(船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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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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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속일 수 없는 법. 배에서 태어난 유복자도 정치가가 되었다. 조선 학문을 총괄하는 홍문관 대제학까지 올랐다. 그의 정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모두 세 차례 유배형에 처했는데, 마지막 두 번이 희빈 장씨와 관련이 있다. 서포의 남해 귀양은 기사환국(1689) 때 결정됐다. 숙종 15년 서인 세력이 희빈 장씨 아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일거에 숙청당한 사건이다.
서포는 희빈 장씨 아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뿌리 깊은 서인 집안이기도 하거니와,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서포의 다섯 살 형 김만기의 딸이었다. 인경왕후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자, 다음에 들인 왕비가 인현왕후였고, 인현왕후는 아들이 없는데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아 이 사달이 벌어졌다.
1687년 9월 14일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 갔던 서포는 1년 2개월 뒤 풀려났다가 1689년 3월 7일 경남 남해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선천은 압록강이 지척인 신의주 아랫마을이고, 남해는 남해안의 절도(絶島)다. 불과 1년여 만에 서포는 한반도 북쪽 끝으로 쫓겨갔다가 남쪽 끝으로 다시 쫓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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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남해는 배를 타고 노량해협의 거친 물결을 헤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맞다. 바로 그 노량 바다다. 이순신이 순국했던). 남해에 상륙한 서포는 다시 바다를 건넜다. 섬 속의 섬 노도에 들어가서야 긴 유배길이 끝났다. 그리고 섬 속의 섬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시조시인 박현덕이 서포의 기구했던 삶을 노래했다.
‘평북 신천 귀양지 나온 것이 어제 같아/ 서울 본집 텃밭에 채소를 가꿨는데/ 그것을 거두지 못하고 노량해협 건넌다// 파도소리 따라가다, 남해를 굽어보면/ 흥건한 가슴앓이 남기고 간 아버지/ 순절한 강화 바다가 예서 물결 파랑 친다// 뱃멀미에 쪽잠 들자 홀연히 뵈는 아버지/ 한동안 엎드려서 두견처럼 울었다/ 꼿꼿한 들풀이던가, 바람 속에 사는 일은.’ -박현덕, ‘노도 가는 길 1’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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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구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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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에게 어머니는 스승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어머니 윤씨는 아이들을 부지런히 그리고 엄격히 가르쳤다. 손수 비단을 짠 돈으로 『좌씨전』 한 질을 사 주었고, 『소학』 『사서』 같은 책을 베껴 두 아들이 읽게 했다. 남해로 유배 가는 아들에게도 “아무 쓸모 없다고 하면서 공부를 그만두어선 안 된다”고 일렀다고 한다. 서포는 어머니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 기록이 『선비정경부인행장』에 생생히 남아 있다. 유배지에서 뒤늦은 부고를 들은 서포가 눈물로 증언한 어머니의 행적이다. 윤씨는 서포가 남해로 내려온 해 12월 돌아갔다.
‘남과 처지를 비교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남에게 웃음거리나 되고 행실 없는 이를 욕할 때 꼭 과부의 자식이라고 하니 이 말을 너희는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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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의 문학을 이해할 때도 어머니는 핵심 키워드다. 특히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 소설은 어머니와 관계가 깊다. 귀양 중인 서포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구운몽』을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당대의 사대부가 왜 한글 소설을 썼을까. 『서포만필』에 나오는 공식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와 글은 자기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고 해도 이것은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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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해석도 있다. 조선 후기 사대부 여성 사이에서 한글 소설 읽기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하여 사대부 자녀가 소설을 지어 어머니에 바치는 효도도 유행이었단다. 그 시절 서포뿐 아니라 다른 사대부도 효도 선물로 한글 소설을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유배를 떠나기 전 서포는 어머니를 위해 성인의 말씀과 패관잡기 등 다양한 글을 모아 밤낮으로 읽어드렸다. 곁에서 모실 수 없는 신세가 됐으니 소설이라도 써야 했을 터이다. 유불선의 동양사상을 파격적인 연애 이야기로 풀어낸 『구운몽』과 본처와 첩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사씨남정기』 모두 사대부 문학이라 하기엔 소재가 여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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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먹고 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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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는 남해 노도에서 약 3년 2개월을 살았다. 서포가 유배 시절 기록을 많이 남기진 않았으나, 주요 저작 대부분이 남해에서 생산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운몽』은 의견이 엇갈린다. 국문학계는 『구운몽』을 선천 유배 시절 작품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남해에선 남해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구운몽』이 선천 시절 작품이라는 근거는 선천에서 어머니를 위해 글을 썼다는 문장 한 줄 뿐입니다. 서포는 남해에서도 어머니를 위해 글을 썼습니다. 무엇보다 소설 속 배경이 남해 유배지 주변 환경과 맞아 떨어집니다. 양소유가 팔선녀와 희롱을 하는 장소가 석교이지요. 노도 건너편 갯마을이 석교입니다. 지금도 마을에 옛 돌다리가 있습니다. 소설에 스님이 등장하는 건, 노도 건너편 용문사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것으로 보이고요. 서포는 용문사를 노래한 시편도 남겼습니다. 노도가 떠 있는 앵강만 바다가 결정적 증거입니다. 앵강(鸚江)은 ‘앵무새 강’이라는 뜻입니다. 앵무새 우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강처럼 잔잔한 바다여서 앵강만입니다. 『구운몽』에서 동정호가 딱 그렇게 묘사되지요. 『서포만필』에서 하필이면 앵무새 비유가 나오는 것도 이 바다가 앵강만이어서입니다.”
남해군청 서재심(56)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서 해설사처럼 남해에선『구운몽』이 남해 작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남해 읍내의 남해유배문학관도 『구운몽』을 남해 작품으로 소개하며, 노도 문학공원은 아예 『구운몽』의 주요 장면을 청동 조각상으로 재현했다. 『사씨남정기』는 『구운몽』과 달리 학계도 남해 작품으로 인정한다. 제목에 증거가 있다. 남정기(南征記). 본처 사씨가 남쪽으로 떠난 이야기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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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최후의 거처가 남해였는지 남해 부속 섬 노도였는지도 불분명하다. 여러 기록에서 남해는 보이지만, 노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남해 사람 사이에서 소문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앵강만 어귀 노도에 노자묵고(노자니) 할배가 살았는데, 허구한 날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다만 바라보고 놀고먹고 하다 죽었대.’ 그 노자묵고할배가 놀고먹고 할배, 즉 서포였다고 남해 사람은 믿는다. 서포의 마지막 거처였다는 초옥도, 서포가 물을 길었다는 우물도, 서포의 주검을 5개월가량 모셨다는 헛묘도 모두 남해에서 떠돌던 얘기를 재현한 것이다. 남해 출신 고두현 시인도 서포의 노도살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여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서포의 한 맺힌 유배길을 되짚었다.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날인가/ …/ 꽃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을 모아/ 화전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 고두현, ‘남해 가는 길’ 부분
남해=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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