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 끌려간 언니 미안해요" 울음바다 된 형제복지원 재판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
“언니들이 남자 두세 명에게 끌려갔어요. 당하고 온 거죠. 제가 열 살 때였으니까 그때는 뭔지 잘 몰랐죠.”
15일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에서 31년 만에 다시 열린 형제복지원 사건 재판. 피해자 측 박준영 변호사가 생존자들의 사연을 읽어 내려가자 법정에는 눈물 흘리는 이들이 가득했다. 이날 법정에는 다리를 저는 등 현재까지 후유증을 겪는 피해 생존자 40여명이 참석했다.
감금과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암매장 등이 행해졌다는 의혹을 받는 형제복지원의 원장 고(故) 박인근씨는 1989년 횡령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2년 동안 총 7번에 걸친 재판에서 특수감금 혐의는 끝내 무죄로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근거는 내무부 훈령 410호였다. 부랑인을 임의로 단속할 수 있으며 수용인들의 동의나 수용기한 없이 수용시설에 유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은 “위헌인 내무부 훈령 410호가 적법하고 유효함을 근거로 삼아 무죄를 선고한 이 사건 확정판결은 법령 위반이 있다”며 비상상고 했다. 비상상고는 확정된 형사 판결에서 위법한 사항이 발견됐을 때 대법원이 다시 심리하도록 하는 비상구제절차다.
이날 고경순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과거 판결은 내무부 훈령의 위법성을 간과했고 ▶내무부 훈령이 적합하더라도 울주 작업장은 허가받지 않은 시설이었으며 ▶가혹 행위를 수반한 감금은 훈령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고 부장은 “이번 비상상고를 통해 원장의 특수감금이 정당행위가 아니었음을 천명하는 것이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우리 사회 정의를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라며 “무죄 판결을 파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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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준영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아픔과 투쟁에 대한 언급 없이는 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며 이들의 사연을 20분에 걸쳐 소개했다.
형제복지원에서 퇴소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신예씨의 기억은 형제복지원 이전에 머물러 있다. “최근에 가장 재밌는 TV 프로그램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웃으면 복이 와요”라고 답한다. 이는 1985년에 종영된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이 밖에도 박 변호사는 아직도 아침 6시면 놀라서 일어나고, 남자들에게 끌려갔던 언니들을 막아주지 못해 죄책감을 갖는 등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곳곳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고, 한 피해자는 법원을 나서며 “너무 많이 울었다”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 박준영 변호사의 진술 중 일부
후유증. “아침 6시면 일어나요. 놀래서.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기억. “기억이라는 거 어떻게든 생각이 나요. 너무 맞았던 기억, 끔찍하게 죽어간 사람들, 내 손으로 매장했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어요.”
원망. “동네 형들과 부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담배 연기가 싫어서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어요. 그걸 원망해요. 담배 연기 좀 참고 앉아 있지.”
죄책감. “언니들이 남자 두세 명에게 끌려갔어요. 당하고 온 거죠. 제가 열 살 때였으니까 그때는 뭔지 잘 몰랐죠. 근데 생각하면 그게 너무 미안해요. 그때 알았더라면, 알아도 힘은 없었겠지만 하지 말라고 보호는 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가슴 아파요.”
보상. “박인근과 그 일가는 떵떵거리며 잘 살았는데, 우리가 힘들게 살면 공평하지 않잖아요. 저희 암 투병 중인 분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죽기 전에 정말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자부심. “다른 사람의 동정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서, 증언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의 주인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 발로 서서, 제 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길에 매진할 거예요.”
박 변호사는 “내무부 훈령 410호가 발령된 1975년 대한민국은 이른바 긴급조치의 시대였다”며 “긴급조치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거쳐 위헌, 무효임이 확인됐는데 이 사건은 그대로 둔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의 경험과 감정을 잘 표현해주신 진술 잘 들었다”며 재판의 쟁점이 되는 부분을 짚었다. 인권을 침해했다 하더라도 법령이 아닌 행정부 규칙에 해당하는 내무부 훈령을 위헌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당시 판결은 무죄의 여러 사유를 들고 있는데 훈령만으로 파기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검찰이 해당 내용에 대한 설명 자료를 제출하면 이를 검토한 후 다음 기일을 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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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비상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해도 박 원장의 무죄 판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재심과 달리 기존 판결의 위법 사항을 시정할 뿐 박 원장에게 유리한 재판 결과를 불리하게 뒤집을 수는 없다. 다만 사법부 스스로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의미와 함께 국가 상대 손해배상 등 피해 회복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박 변호사는 “법령 위반을 이유로 비상상고 된 첫 사례이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이 가진 힘이 크기 때문에 원하는 판결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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