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막걸리 버려 뺨맞은 뒤, 뭐든 안 남기고 먹게 되더라”
‘한국인의 밥상’ 10년 받은 최불암
대학합격 축하주 준 변영로 시인
술지게미 털었다고 대뜸 호통
어머니 가게 온 문인들 김치만 시켜
난 어디 가서 김치 더 달란 말 못해
북한 음식 현지서 못 다뤄 아쉬워
7세에 여읜 부친 고향 해주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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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거제도의 겨울 대구를 알리고 10년이 지났다.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이다. 노배우 최불암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지역의 향토 음식을 맛보는 이 방송은 명실상부 한국의 대표 교양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느릿하면서도 정겨운 그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요리와 지역에 얽힌 이야기가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 KBS에 따르면 방송 기간 국내와 해외까지 이동 거리는 35만여㎞, 1400여 곳의 8000여 가지 음식을 선보이는 동안 프로그램을 거쳐 간 제작진은 100명이 넘는다. 여든을 바라보는 망팔(望八·71세)에 방송을 맡은 그는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망구(望九·81세)가 됐다.
그는 “이 나이까지 방송 일을 하며 복에 겨운 밥상을 받으러 다닌다. 전국의 우리 어머니들이 나 때문에 굽은 허리, 무릎 관절 아픈 것도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며 “10년 동안 받은 그 사랑을 어떻게 다 갚나. 방법을 아직도 못 찾고 있다”고 했다.
7일부터 4주에 걸쳐 방영되는 10주년 기념방송을 앞두고 5일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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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한국인의 밥상’을 정의하면.
A : “우리나라 밥상은 참 남다른 것 같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보면 밥상 대부분이 어려운 시절에 가족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궁핍한 식재료를 갖고 지혜를 짜내 만든 것이더라. 나의 어머니는 김치에 꼭 생선을 넣어서 담그셨다. 조기도 넣고, 낙지도 넣고 밴댕이도 넣고 제철에 나오는 싼 생선을 넣었다. 그게 익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 김치가 익으면 생선을 골라 내 밥 위에 얹어 주시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창 성장기였던 아들한테 고기를 먹일 돈은 없으니 그걸로 단백질을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Q : ‘최불암의 밥상’에는 무엇이 있나.
A : “무짠지, 오이지를 좋아한다. 일곱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갓집에서 자랄 때 많이 먹었다. 무짠지가 밑천이 안 드는 반찬이다. 무를 소금에 절이기만 하면 된다.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었는지 외할머니가 무짠지를 그렇게 먹였다. 지금도 밥상에 무짠지가 있어야 한다. 입안을 시원하게 하고 밥맛을 나게 한다.”
Q : 10년 방송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과 음식은.
A : “기억에 남는 건 음식보다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남원에서 추어탕을 촬영하던 때였던 것 같다. 맛을 보면서 ‘산초(山椒)’가 좋아서 추어탕도 맛있는 것 같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촬영을 마쳤는데 어르신이 동네 느티나무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을 잡고는 ‘줄 게 없다’며 그 산초를 신문지에 정성스럽게 싸서 주더라. 그런 분들이 있어서 1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Q : 꼭 다루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가.
A : “북한 음식을 현지에서 못 다룬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송해 선생은 ‘전국노래자랑’이 평양 갔었다는 걸 가장 큰 자랑으로 삼는다. 우리도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만약 북한에 갈 수 있다면 황해도 해주를 꼭 가보고 싶다. 거기가 아버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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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머니(이명숙 여사)는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주점을 운영했다. 시인 김수영, 변영로, 박인환 등 단골손님인 당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최씨가 문화에 눈을 뜬 계기이기도 했다.
Q : 어머니 가게에 오간 문인들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
A : “문인들이 ‘은성’에 오면 그렇게 김치만 달라고 그랬다. 돈이 없어 안주를 시킬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11월에 김치를 담그셨는데, 큰 항아리 두 개에 담그시면 12월을 못 넘겼다. 그래서 나는 어디 가서 김치 더 달라는 말을 못한다. 어머니가 김치 떨어질까 봐 하도 노심초사하시던 걸 봐서다. 또, 단골 중에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변영로 시인이 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 그분이 축하한다고 막걸리를 한 잔 주셨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잔을 돌려드리려다 술지게미가 남았길래 잔을 털었더니 대뜸 뺨을 때리며 호통을 치시는 거다. 귀한 쌀로 만든 술을 버렸다고. 그때부터 술이든 음식이든 남기지 않고 먹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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