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핸드폰사진관] 덕수궁의 밤, 조선의 시간을 걷다.
서양에선 이즈음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어스름한 궁에 조명이 바닥에서 오릅니다.
하늘이 지은 푸름과 사람이 지은 붉음이 한데 어울리는 시간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음력 3일(9월 12일)입니다.
초승달입니다.
조선 궁궐의 마지막 정전입니다.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하며 황제 양위식을 했던 쓰린 시간을 알기에
짙푸름이 더 아립니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렇습니다.
덕수궁은 그 시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공간입니다.
석조전은 무엇보다 낯섭니다.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석조 건물입니다.
오래도록 피기에 '목백일홍'이라고도 합니다.
어스름에서조차 도드라진 붉음,
조선의 시간에서도 피었을 붉음일 겁니다.
‘조용히 내려본다’는 의미라 합니다.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목적으로 지은 회랑 건축물입니다.
유난히 가배(커피)를 즐겼던 고종황제가 쓴맛을 느리게 삼키며 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고종황제는 예순에 딸 덕혜옹주를 얻었습니다.
금지옥엽 딸 손 잡고 유현문을 통해
유치원 길 바래다주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먹먹해졌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 다니라는 유현문,
황제의 간절한 바람이 담겼을 문입니다.
궁 뒷길입니다.
저 길로 나아가면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습니다.
열강의 틈에 낀 그 시절의 이야기,
아픈 역사를 지켜봤을 나무는 어느새 아름드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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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 답답했던지 뿌리가 땅 위로 나왔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듯합니다.
고종의 침전이기도 했으며, 예서 승하했습니다.
오가는 이들이 하나같이 휴대폰을 꺼내 듭니다.
너나없이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그들이 기록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이야기일 겁니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임시로 머물렀던 행궁 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궁인데 단청이 없습니다.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단청하지 않았다는 게 해설사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멀고 낯설고 두려운 시간은 반복되었습니다.
그곳 13층에 전망대가 있습니다.
(궁의 야간개장이 9시까지이고 전망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궁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지나왔던 조선의 길과 이야기가 오늘의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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