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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한 옷차림 여섯살 연상녀, 어떻게 쇼팽 사로잡았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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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여성’스러운 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잠시도 그녀의 손을 떠나지 않는 시가였다. 폐가 나쁜 쇼팽도 시가를 가끔 피운다. 하지만 남이 내뿜는 시가 연기는 역겨웠다. 옷은 남자 옷이었다. 바지 위에 남자의 프록코트와 남자의 재킷의 허리를 조금 잘록하게 고쳐 입고 있었지만, 그렇게 고쳐도 여자의 옷이 될 수 없었다.


전혀 세련미를 찾을 수 없는 투박한 옷이었다. 모자도 통이 높고 챙은 짧은 남자의 토퍼(Topper)였다. 세련의 전형으로 불리던 쇼팽이었다. 그는 특히 옷매무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척 보면 그 옷의 재질이 최고급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차림새는 쇼팽의 패션 감각에 전혀 맞지 않았다.


생김새와 언행도 여성스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은 머리에 피부는 까무잡잡했고 약간 돌출된 까만 눈은 사람에게 주술을 거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는 시가 때문인지 약간 쉬어 거칠었고 자기주장을 토로하는 모습엔 여성스러운 조심스러움이 어디에도 없었다. 높고 분명한 말투로 신성한 종교와 혼인제도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으며 자유 연애를 부르짖을 때는 반대하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폴란드의 잘 교육받은 귀족 자제와 어울려 자랐고, 파리에 와서도 명망 있고 예의 바른 귀족 가문의 여인들을 주로 보아온 쇼팽에게 칙칙한 남성 복장을 하고 거침없는 언행을 일삼는 상드의 모습은 파격이었다. 별 희한한 여자도 있다는 생각에 호감은커녕 오히려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쇼팽은 모임을 나서며 친구에게 자신의 느낌을 여과 없이 전했다.


“뭐 저런 괴상한 여자가 다 있어. 여자가 맞긴 한 거야?”


쇼팽이 조르주 상드를 처음 만난 것은 마리 다구부인의 살롱에서였다. 마리는 연인 프란츠 리스트와의 스위스 도피 여행에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살롱을 다시 열었다. 그 살롱은 매우 자주 열렸다. 저녁 시간에 음악계와 문학계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문학과 예술 전반, 그리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즐겁게 토론을 주고받았다.


같은 건물 아래층에 살던 상드는 리스트-마리 커플의 절친으로 이 모임의 단골 멤버였다. 리스트가 가깝게 지내던 쇼팽을 모임에 이끌어 온 것은 1836년 10월, 쇼팽이 파리에 온 지 5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쇼팽은 26살, 상드는 32살이었다.


불쾌했던 쇼팽과 달리 상드의 눈에 쇼팽은 귀여웠다. 그녀는 친구에게 “쇼팽 씨는 진짜 소녀가 아닌가요”라고 물으며 재미있어했다. 훗날 그녀가 소설에 묘사한 쇼팽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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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도 마음도 섬세했다.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독특한 아름다움, 감히 말하자면 성별도 나이도 모호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슬픔을 담은 여인의 고운 얼굴에 올림포스의 젊은 신처럼 순수하고 늘씬한 몸을 지닌 천사랄까. 그러한 조합을 완성하는 것은 다정하면서도 준엄하고,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표정이었다.”


상드는 수줍음 타는 음악가 쇼팽과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리스트를 졸랐다. 이때 상드는 이미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가였고 쇼팽은 음악 애호가와 귀족 사이에서 피아니스트 혹은 피아노 레슨 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정도였다.


처음 상드를 만나고 얼마 후 쇼팽은 자신의 새 아파트에서 저녁 파티를 열었다. 몇몇 친한 친구들을 초대한 그 파티에 리스트가 초대받지 못한 상드를 데리고 왔다. 상드는 평소에 입고 다니던 칙칙한 바지 대신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판탈롱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나름 여성스럽게 꾸민 것이었다. 붉은색과 흰색은 폴란드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상드는 쇼팽의 벽을 깨뜨리려 애썼는데 애정 때문인지 호기심 때문인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쇼팽은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이 자유분방한 뒤드방 남작 부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상드는 남편을 버리고 나온 두 아이의 엄마였고 이에 더해 다채로운 연애로 화제를 뿌렸다. 상드가 그녀의 법적인 남편 카지미르 뒤드방남작을 떠나 파리로 옮겨온 후부터 쇼팽과 결정적인 관계에 빠지게 될 때까지 그녀를 거쳐 갔던 남성 목록에는 유명 작가,, 시인, 정치인, 의사, 음악가 등이 올라있었으며 그 목록은 길었다.


그런 그녀에 대해 좋지 못한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은 많았다. 그녀의 박식, 당당함, 적극적인 성격을 좋아하는 이도 많았지만, 또 다른 다수는 상드의 행동이나 복장, 태도, 사생활 혹은 당시로선 상당히 대담하고 선정적인 묘사가 포함된 자극적인 작품에 노골적으로 경멸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어떤 시대에나 그 시대가 인정하는 모범을 따르지 않을 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를 각오해야 한다. 음탕한 여자, 부정을 저지르는 애 엄마 등이 그녀에게 붙은 전형적인 나쁜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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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몇 번을 만났다. 한 음악 애호가의 집에서 열린 음악 파티에서는 쇼팽이 자신의 발라드를 연주했는데 상드는 그 음악에 빨려 들어갈 듯 몰입했다. 상드의 쇼팽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쇼팽의 연주가 끝나고 상드는 같이 걷자고 하며 쇼팽을 정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그의 음악을 칭찬했고 자신의 음악관도 털어놓았다.


사실 상드는 기타와 하프시코드를 연주할 수 있었고 파리로 와서는 오페라와 연주회를 즐겨 찾던 음악애호가였다. 둘은 정원을 한참 동안 돌았다. 쇼팽은 상드의 음악 지식에 놀랐다. 쇼팽은 이어지는 만남에서 처음 보았던 겉모습 뒤에 숨은 상드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밝고 지적이면서 상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양한 소재로 같이 있는 시간을 금방 지나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이 다소 줄어들었을 뿐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당의 가르침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에게 반 전통적이고 반 규범적인 모습의 파격적 언행을 보이는 상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르샤바에 있는 부친 미코와이는 편지마다 ‘화려한’ 파리에서 혼자 떨어져 생활하는 아들에게 조신하기를 당부했다. “아들아, 조심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은 실수하기 쉽단다. 항상 조심하고 추문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라.” 자유분방한 유부녀와 엮기면 추문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시기 쇼팽은 폴란드 귀족 집안의 딸이며 친구의 여동생인 9살 아래의 마리아 보진스카를 마음속에 품고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 소녀의 부모는 청혼을 받아들여 약혼까지는 허락하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머뭇거리고 있었고, 연인으로부터의 편지는 처음과 달리 점점 온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마리아의 부모는 쇼팽의 병약한 모습에 주저하고 있었다.


쇼팽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풀어갈 수도 없는 마리아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지혜로운 누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드는 많은 것을 경험해 풍부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연애에 대해서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박식함으로 여러 경우에 적합한 조언을 해줄 줄 알았다.


1837년 7월 쇼팽은 결국 마리아로부터 파혼을 통보받았다. 쇼팽은 담담히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드와의 사이는 쇼팽이 그 풋사랑의 실패가 주는 절망감을 털어놓게 되면서 발전하였다. 둘이 만날 때면 대화의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 기간 자신의 집과 어머니의 품을 떠나 있던 쇼팽은 모성애 풍부한 여인의 모습, 가장 그리운 ‘여성’의 모습을 상드에게서 발견했다.


상드는 마음 약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면서 쉽게 상처받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다가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쇼팽은 실연한 이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기에 그를 자상하게 챙기고 보듬어 주는 상드의 손길은 그에게 더없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상드의 매력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속에 숨어있었다.


쇼팽은 그동안 너무 그녀의 겉모습과 남이 전하는 얘기에서 얻은 선입감에 묶여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쇼팽의 마음 한구석에는 추문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제어하고 있었다.


천재적 음악성, 완벽을 추구하는 철저한 정신, 과묵함, 귀족적 용모와 매너, 옷차림의 세심함 등 쇼팽의 모든 것에 마음이 끌린 상드의 마음은 점차 애정으로 기울었다. 이듬해 4월 한 친구 집에서의 식사 자리에서 솔직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쓴 메모를 쇼팽에게 보여주었다. 마음을 결정짓지 못한 쇼팽의 얼굴에는 답이 없었다. 상드는 자기보다 어린 남성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보살핌을 베푸는 것이 천성에 맞는 사람이었다.


따뜻한 미소와 배려를 보였지만 조심하며 주춤거리던 상드를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한 계기는 2주 후 퀴스틴 후작의 별장에서의 모임이었다. 그 저녁 모임에서 쇼팽은 엄숙한 곡조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그 곡은 나중에 그의 소나타 2악장에 들어갈 장송행진곡이었다.


후작의 별장은 파리 인근의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호숫가의 정취와 어우러진 깊고 슬픈 곡조에 상드는 결정적으로 쇼팽에게 빠져들었다. 상드는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쇼팽은 상드의 첫 키스를 받아들였다.


상드는 쇼팽이 아직도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키스를 받아들인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음이 딴 곳에 있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열정이 온도를 더 할수록 상드의 고민도 깊어갔다. 당시 그셰마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 드러난 상드의 모습은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진, 수많은 남자를 거쳐 간 바람둥이 여인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주는 두려움에 떠는 소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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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부터 잘 알고 지낸 쇼팽과 그셰마와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털어놓는 상드의 속마음은 쇼팽에게 고백하고픈 진솔한 자기 마음이었다.


그 둘은 이 무렵부터 몇 달 사이에 갑자기 발전해 깊은 관계로 넘어갔다. 이 시기의 어느 날 쇼팽은 그셰마와에게 급전을 보내 밤늦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빨리 만나자고 했다. 아마도 깊은 관계에 빠져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놀라 조언을 구하려던 것이었을 것이다. 21살에 파리로 온 후 성을 죄악시하며 철저한 금욕생활로 깨끗한 이성 관계를 유지해온 쇼팽으로서는 큰 변화였다.


상드도 그런 쇼팽의 변화에 놀랐다. 풋사랑을 대신해 성숙한 사랑이 쇼팽에게 들어왔고 두 사람은 어느새 커플이 됐다. 쇼팽이 자신이나 주위 친구, 그리고 가족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의 사람을 ‘일생의 여성’으로 맞았다.


몇 개월 후 상드는 화가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 – 1863)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신이 당장 죽음을 내리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3개월간의 온전한 황홀함을 경험했으니까요.” 얼마 후 두 사람은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를 향해 도망치듯이 파리를 떠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화가이면서 두 사람의 오랜 친구였던 외진 들라크루아가 남긴 쇼팽과 상드의 그림은 이 시기에 그려졌다. 일반적 이미지와 달리 피아노를 치는 쇼팽은 다소 커 보이고 상드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진지한 사랑이 느껴진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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