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댁 곳간서 나온 서류더미엔…"나라 없으면 부자도 없다"
지난해 7월 경주 최부자댁 곳간서 서류더미 발견
1만여점 서류엔 국채보상운동 등에 참여했던 내역
서울 근현대사기념관서 10월 13일까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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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28일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자댁 가옥.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해 막대한 재산을 가졌던 경주 최부자댁에 손님이 찾아왔다. 박영호 경북대 한문학과 교수와 지인들이었다. 박 교수와 지인들은 가옥을 관리하는 최창호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이사와 함께 최부자댁을 둘러보면서 곳간을 발견했다. 과거 김치독 등 생활용품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곳간에 들어선 박 교수는 나무 궤짝을 보고는 “고문서가 있을 것 같은데 열어보라”고 했다. 궤짝을 열었더니 1만여장의 서류 더미가 발견됐다. 최부자댁이 국채보상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주고받은 회신 등이었다. 최 이사는 “72년 사랑채가 불탄 뒤 나무 궤짝을 곳간에 보관하고 나서 40여년간 잊고 있었다”며 “서류 더미에는 일제강점기 전후로 독립운동 등이 기록된 문서가 있었는데 한문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이 해독 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는 광복절을 앞두고 이들 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백산무역과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으로 주제로 지난 9일부터 오는 10월 13일까지 열리는 전시회가 그것이다. 전시회에서는 고문서 중에서도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화재급 자료만 엄선해 내놓았다.
1907년 당시 국채는 1300만원이었다. 경주에서는 1907년 11대 최부자 최현식과 이중구 홍문관 전 교리의 주도 아래 금연회사가 설립됐다. 담뱃값을 아낀 돈을 기부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자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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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연회사의 설립 취지서가 지난해 발견된 서류 더미에서 나왔다. 음력 1907년 2월 5일에 쓴 취지서에는 “우리나라 외채가 1300만원에 이르렀으니 지금 갚지 않으면 장차 갚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재물이 없으면 땅이 없어지는 경우이니, 땅이 없으면 어찌 나라가 있겠으며 나라가 없으면 어찌 가정이 있겠습니까?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에 빌린 돈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며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다. 일제는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 정부에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했다.
같은 해 6월 작성한 국채보상 의연금 목록에는 최현식과 아우 최현교가 각각 100원과 50원을 기부했다. 이는 당시 군수의 한 달 치 월급이었다. 이외에 경주군민 5073명이 총 3250원을 모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는 “전국 곳곳에서 국채보상운동을 했으나 참여자 명부와 성금액수가 기재된 의연금 성책, 취지서, 각종 공문 등 일괄 문서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이외에도 12대 최부자 최준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맡아 전 재산을 담보로 제공해 독립운동 자금 조성에 기여한 문서도 나왔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 운영자금의 6할을 감당했다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했던 최준은 지금 돈으로 200억원에 이르는 최부자댁 66만평 전답을 담보로 일본 식산은행에서 35만원을 대출받았다. 이 내용이 담긴 1922년 2월 14일자 근저당설정계약서가 지난해 발견된 서류 꾸러미에서 나왔다.
이외에도 최부자댁의 가훈인 6훈에 해당하는 기록들도 대거 발견됐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를 실천하기 위해 1600년대부터 어려운 사람에게 곡식을 지급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됐다.
경주=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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