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행→블록체인 '커리어 전환' 3번… '갑자기'는 없었다
■ Editor's Note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금융·경제 중심지입니다. 수 많은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본사(Asia pacific Headquarter)가 몰려 있죠. 그만큼 본인만의 글로벌 커리어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여성 리더들도 많습니다. 안태현 젠가케이·로드스타트 대표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안 대표는 20년 차 금융전문가입니다. 씨티뱅크 아태 부사장으로 커리어 정점을 찍던 50대에 창업을 했죠. 그는 ‘엄마’와 ‘여성’을 지우고 독하게 일에만 몰입했던 시기에 오히려 미래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그에게 커리어 선택의 기준과 성장의 경험을 들어봤습니다.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글로벌 여성 리더의 일과 삶” 3화 중 일부입니다.
30대는 단거리 달리기인 줄 알았는데, 40대에 보니 인생은 속도 조절이 중요한 마라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50대에 들어서니,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마라톤이 아니라 여정(Journey)이더라고요.
싱가포르에서 스타트업 컨설팅 회사 젠가케이·로드스타트를 창업한 안태현 대표. ⓒ안태현 |
씨티뱅크 부사장에서 블록체인 스타트업 창업까지
Q. 건축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어요.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취업했죠. 그런데 1997년 금융위기가 왔고 자연스레 진로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때 주목한 게 당시 떠오르던 온라인 비즈니스였어요. 건축은 땅에 귀속되지만, 온라인 공간은 그렇지 않으니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고민 끝에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한 B2B 플랫폼을 창업했어요. 90년대 후반이었으니 무척 일렀죠. 기업의 CI와 이미지에 맞는 프리미엄 굿즈를 디자인하고 동남아, 중국 등 회사에 발주할 수 있는 플랫폼이었죠. 하지만 배경지식도, 경험도 적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결국 3년 만에 사업을 접었어요. 잘 알지 못하는 시장을, 적절하지 못한 타이밍에 뛰어들었단 결론을 내렸어요.
당시 회계도, 재무도 모르는 상태로 사업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20여명의 직원과 소통하기도 쉽지 않았죠. 경영 공부를 조금 더 해야겠다 결심하고 와튼스쿨 MBA에 갔어요. 와튼스쿨은 졸업 후 금융권으로 진출하는 케이스가 많았고, 저도 자연스레 금융 분야로 방향을 정했죠. 씨티은행에 입사해 7년간 한국에서 파생상품 펀드를 담당했고, 이후 7년은 싱가포르 씨티은행의 아시아·라틴 지역 투자전략팀의 선임부사장으로 일했어요.
Q. 임원이 되어보니 시야가 좀 달라졌나요?
업무의 많은 부분이 16개 나라의 리서치팀 헤드와 소통하는 일이었어요. 한국에서 일할 때만 해도 아태 본사는 까다로운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주요한 전략이나 결정은 아태 본부 오피스에서 하고, 거기 소속된 국가는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아태 본사 헤드들이 현지 사정을 모른다고 비판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제가 그 입장이 돼보니 일단 나라마다 참 다르더라고요. 직원들의 업무 성향도 다르고, 투자자들의 투자 행태나 투자 포트폴리오들도 상이하다 보니 모두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기 쉽지 않았어요. 가급적으로 각 나라의 의견들을 반영하고, 최대한 지원하려고 노력했어요.
임원이 되어서 시야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입장’이 바뀌어서 더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다양성에 대해 체화하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저는 ‘역지사지(Put yourself in other people’s shoes)’란 단어를 좋아해요. 무조건 비판만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죠.
Q. 그런데 갑자기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분야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씨티뱅크에 있던 마지막 1~2년에 무척 고민이 컸어요. 금융 산업은 다른 IT 분야보다 발전 속도가 느려요. 그러다 보니 이 업계에서 얼마나 더 오래 일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어요.
그간 일하는 여성으로 무척 힘들게 커리어를 쌓아왔어요. 제 자리와 커리어가 누군가의 드림 잡(Dream job)이 될 수 있잖아요. 여성 후배들에게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싶었죠.
한편으론 만약 퇴사를 한다면 이후 커리어로 어떤 길이 좋을까 고민했어요. 힘들었던 창업가 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멘토나 액셀러레이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었죠. 그렇게 스타트업 컨설팅을 구상하게 됐어요.
Q. 지금의 ‘젠가케이’인가요?
맞아요. 싱가포르 블록체인 업계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후배들이 제게 이것저것 많이 물었어요. 회사 설립은 어떻게 하는지, 회계나 세무 신고는 어떻게 하는지, 규제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요.
후배들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여러 컨설팅 회사들을 만났고, 그중 하나가 ‘젠가(Jenga)’였어요. 블록체인 쪽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회사였죠. 협업하는 과정에서 젠가 측에서 먼저 한국에 특화된 컨설팅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주셨어요. 당시 다루던 케이스들이 대부분 중국 사례였거든요. 한국 기업들의 컨설팅을 하는 업무가 필요했죠. 그렇게 젠가케이(Jenga Korea)를 시작하게 됐어요.
Q. ‘젠가케이’와 함께 ‘로드스타트’ 라는 스타트업도 만들었어요.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젠가케이를 운영하다 보니 블록체인 분야 너머로 확장해보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로드스타트(LODESTART)’란 또 다른 회사예요. AI·빅데이터·핀테크 등 스타트업 리서치를 하는데요. 해외 VC나 투자자들이 다른 나라의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언어가 다르고 상장 회사들과 달리 스타트업들은 공시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가 어렵죠. 또 스타트업의 경우 해외 투자자들을 만나거나 피칭을 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요.
로드스타트의 파트너들은 해외 헤지펀드에서 중소형주식을 운용했거나 글로벌 IB에 소속됐던 리서치 전문가들이에요. 저희가 가진 경험과 능력으로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자고 함께 뜻을 모아 만들게 됐어요.
Q.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영국의 최대 음원 유통회사인 디토뮤직과 협업한 적 있어요. 초기 시드 투자부터 시작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추진했어요. 메이저 제작사와의 파트너십 체결도 도왔죠. 최근에는 음악 저작권의 NFT화 과정도 맡았고요.
Q. 부산광역시 블록체인 정책 고문도 역임하셨어요.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일단 싱가포르는 국가 자체가 작고 규제 기관이 하나라서 블록체인과 가상자산과 관련한 정책을 강하고 빠르게 추진해요. ‘싱가포르 주식회사’라 불릴 정도로 명확하게 규제 프레임과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실리를 추구하죠.
싱가포르 사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한국에서 많은 분이 싱가포르에 방문했어요. 당시 현지에서 진행된 간담회를 계기로 부산시가 블록체인 규제 자유 특구 신청을 하게 됐고, 제가 그 과정을 돕게 됐죠. 결과적으론 2019년에 부산이 블록체인 규제 자유 특구로 선정됐어요.
‘블록체인 서울 2019’ 컨퍼런스에서 모더레이터로 토론을 진행한 안태현 대표. ⓒ안태현 |
“커리어 전환, 고민보다 ‘재밌는 일’ 선택했죠”
Q.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한국에서 일할 때부터 싱가포르에 꼭 나와보고 싶었어요. 아이를 기르며 조직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게 녹록지 않았거든요.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겠단 의지를 흐리게 만드는 장애물이 정말 많았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여성이 회사에서 가정 이야기를 하면 프로페셔널 해 보이지 않는단 인식이 많았어요. 육아를 이유로 연차를 쓰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런데 싱가포르 오피스에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싱가포르는 여성들이 일하기에 비교적 환경이 잘 구축된 것 같았어요. 고민하던 중에 남편이 먼저 싱가포르로 이직하게 됐어요. 당시 아이가 2살 때여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너무 고생하고 있었거든요. 저도 함께 싱가포르로 나가야겠다 결심했죠.
Q. 직접 경험한 싱가포르 업무 환경은 어땠나요?
싱가포르는 개인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어요. 일에 대한 합리적인 피드백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느꼈고요.
일하는 여성에 대한 인식도 달랐어요. 제가 다닐 때만 해도 한국의 금융권은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가 컸거든요. 수직적 조직구조와 위계질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싱가포르는 일을 잘하고 전문성만 있다면 여성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육아하는 여성들이 가정 이야기를 하거나 휴가를 내는 것도 편했어요. 같은 조직이지만 싱가포르는 가족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였고요.
Q. 기존에 했던 일과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을 하고 있어요. 전문 지식도 갖춰야 하는 분야고요. 새로운 영역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돌아보면 나름의 연결고리들이 있었어요. 사업을 하다 보니 경영, 경제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싶어서 MBA에 갔고, MBA에서 금융권 진출이 두드러지니 저도 자연스레 그 분야로 가게 됐죠. 당시 가장 큰 시장을 가진 은행에 갔고, 싱가포르에서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를 돕다 보니 컨설팅 창업을 하게 됐고요.
다행인 건 제가 변화를 즐기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좋아한단 점이에요. 제가 제일 못하는 게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거예요. 은행에서도 비교적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고요. 커리어를 바꿀 때도 다른 사람들보다 덜 고민하고, 내가 재미있고 잘하는 것을 따라 선택했어요. 무식하고 용감했달까요. (웃음)
Q. 커리어 선택의 시기마다 기준이 있었나요?
첫 번째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가’였어요.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이 다르잖아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레시피’를 찾는 게 먼저였어요. 제 경우는 보람, 보상, 배움, 자율성이었어요. 나의 일이 사회 혹은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사회경제적으로 일을 통해 보상을 받고 성장할 수 있는가,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선택했죠.
두 번째는 ‘옵션’이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이 일을 계속하는 건 참 슬픈 일이잖아요. 여러 갈래가 있음에도 ‘나의 선택’에 의해 일한다는 느낌이 저에겐 매우 중요했어요. 90년대에 첫 커리어를 시작하며 건축설계 일보다 당시로선 좀 이르게 IT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요.
세 번째는 ‘조직을 떠나서도 내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가’예요. 점점 일이 글로벌하게, 긴밀하게 연결되잖아요. 조직에 속해 일하지만, 커리어를 통해 쌓은 경험으로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게 중요해진 듯해요.
안태현 대표는 “커리어 선택의 시기마다 3가지 기준 있었다”고 말한다. ⓒ안태현 |
“60대까지도 활발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50대에 접어들었어요. 일과 커리어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30대에는 좋은 직장에서 좋은 타이틀을 가지는 것에 우선순위를 뒀어요. ‘엄마’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를 지워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소위 ‘독하게’ 일에 집중했고요.
그런데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인정도 받는데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느라 나의 만족과 행복에 소홀했단 걸 그제야 깨달았어요. 40대 후반쯤이었죠. 작은 회사에서 새로운 세상을 배워나가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지금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요.
이제는 내게 중요한 게 뭔지, 나의 사회적 가치는 뭔지 고민하게 돼요. 일하면서 얻는 사회적 보상이 중요해진 거죠.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Be yourself’ 했으면 좋겠어요. 꼭 모범생이나 엘리트처럼 살지 않아도 돼요. 보이는 것보다 스스로 행복한 선택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만족과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해요. 저는 주도적으로 일할 때,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 만족도가 높더라고요.
Q. 오랜 해외 생활만큼이나 많은 네트워크를 보유한 것 같아요. 인연을 만드는 비법이 있다면요?
(후략)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글로벌 여성 리더의 일과 삶” 3화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