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마다 그가 그립다" 마왕 흔적으로 채운 '신해철 10주기'
공연장에는 마왕을 상장하는 악마뿔 무대 장치가 설치됐다. 사진 넥스트 유나이티드, 드림어스컴퍼니 |
“24년째 댄스가수 외길 인생인 제게 밴드 협연을 알려준 건 (신)해철 형이었습니다. 덕분에 공연의 길로 접어들었고, 지금도 모든 공연에서 밴드와 협연하고 있습니다.”
역동적 춤으로 무대를 휘젓는 가수 싸이가 이례적으로 스탠드 마이크를 잡았다. 기타·베이스·키보드·드럼 연주자를 앞세워 밴드 보컬이라도 된 듯 신해철의 명곡 ‘해에게서 소년에게’, ‘나에게 쓰는 편지’, ‘그대에게’를 열창했다. 26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고(故)신해철 트리뷰트 콘서트 ‘마왕 10th : 고스트 스테이지’의 앙코르 무대에서다.
싸이는 “내가 아는 형은 추모도 유쾌하게 하길 바랄 것 같다”면서 앙코르 전부터 자신의 히트곡 ‘챔피언’, ‘연예인’, ‘낙원’, ‘강남스타일’로 분위기를 달궜다.‘예술이야’를 부를 땐 “해철 형에게 가장 칭찬을 많이 받은 자작곡”이라고 소개했다.
‘마왕’ 신해철의 10주기를 추모하는 이번 공연은 출연 가수 저마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신해철이란 조각들을 무대에서 함께 맞춰가며 완성하는 형태로 26~27일 이틀간 펼쳐졌다. 고인의 아내 윤원희씨가 대표로 있는 신해철 IP(지식재산권) 보유사인 넥스트 유나이티드와 음원·음반 유통사 드림어스컴퍼니가 올 초부터 기획한 무대로, 양일 간 1만2000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1988년 데뷔한 신해철은 밴드 무한궤도와 솔로 활동을 거쳐 록밴드 넥스트의 리더로 활동하며 '그대에게',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도시인', '민물장어의 꿈' 등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사회적 발언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마왕'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2014년 장 협착과 위 축소 수술을 받고 그해 10월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 손상으로 사망해 큰 충격을 안겼다.
신해철 노래를 함께 즐기고 있는 관객들 모습. 사진 넥스트 유나이티드, 드림어스컴퍼니 |
공연 첫날에는 싸이를 비롯해 김범수('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슈퍼주니어 예성('일상으로의 초대'), 마마무 솔라('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넬('날아라 병아리'), 해리빅버튼('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이 참여했고, 둘째 날에는 전인권밴드의 스페셜 스테이지와 이승환('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국카스텐('일상으로의 초대', '라젠카 세이브 어스'), 에피톤 프로젝트('잇츠 올라잇', '그대에게'), 엑스디너리 히어로즈('먼 훗날 언젠가')가 무대에 올랐다. 떼루아 유스콰이어 합창단은 ‘민물장어의 꿈’을 율동과 함께 남녀 혼성 하모니로 들려줬다.
이 외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준 마왕”이라며 영상으로 인사를 전한 방탄소년단 제이홉, “‘50년 후의 내 모습’이라는 본인 노래를 아주 어이없는 거짓말로 만들고 떠난 사람이라 그가 떠난 가을마다 그가 그리워진다”는 배철수의 음성 인사까지 포함하면 공연을 채운 가수는 18팀이다.
18팀 중 유일하게 양일 간 무대에 오른 넥스트(베이시스트 김영석·기타리스트 김세황·드러머 이수용)는 오프닝을 담당했다. 넥스트가 ‘더 디스트럭션 오브 더 쉘: 껍질의 파괴’, ‘라젠카 세이브 어스’, ‘더 드리머’, ‘호프’, ‘머니’, ‘코메리칸 블루스’, ‘영원히’ 등 7곡을 연주하는 동안 보컬의 빈자리는 홍경민, 플라워 고유진, 신화 김동완이 돌아가면서 채웠다. 이색적인 조합에 홍경민은 “이렇게 모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마왕을 향한 존경과 사랑은 모두 같다"고 했다. 고유진은 “마왕이 남긴 노래를 연습하면서 명곡은 영원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범수가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부르자 관객들이 휴대폰 조명을 켜서 응원하고 있는 모습. 사진 넥스트 유나이티드, 드림어스컴퍼니 |
공연에서 불려진 신해철의 노래들은 철학과 사회 이슈를 논하는 걸 좋아하는 달변가이자, 주변의 어두운 곳을 돌아볼 줄 알았던 멘토였던 그를 추억하게 했다. ‘약한 자는 밟아 버린다/ 강한 자에겐 편하다 경배하라/ 그 이름은 돈’이라는 가사의 노래 '머니'를 부른 김동완은 “사회를 위트있게 풍자한 촌철살인 가사”라면서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는 언제나 멘토였다. 내가 가진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듯 느껴졌다”고 전했다. 예성은 “독설가 이미지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달랐다. 라디오 대기실에서 마주쳤을 때 긴장한 내게 장난스럽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셔서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고 밝혔다.
관객들도 각자 간직한 신해철에 대한 추억을 들려줬다. 김제운(46)씨는 “나의 10대를 가득 채운 건 신해철이다. 그가 낸 모든 노래의 가사를 외우고 있다”고 팬심을 자랑했다. 최윤하(41)씨는 “남편이 넥스트의 엄청난 팬이라 신해철의 여러 노래들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넥스트가 하는 공연이고 신해철 10주기 트리뷰트라는 의미가 있어 함께 보러 왔다”고 말했다.
26~27일 신해철 트리뷰트 콘서트와 함께 마련된 특별 전시회 '마왕의 아지트'는 경기 성남 분당에 위치했던 신해철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이다. 황지영기자 |
공연장 내부엔 특별 전시회 ‘마왕의 아지트’도 마련됐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던 신해철의 실제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LP, 기타, 피아노 등 음악 도구 주변에 체스판, 가족사진, 팬레터 등 신해철이 아끼던 소품들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손 글씨 가득한 작곡노트와 90년대초 받은 골든디스크어워즈 상장도 전시됐다.
넥스트의 이수용은 “그간 코로나 등의 이유로 추모공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하다. 어떤 방식이건 앞으로 다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보자”고 제안했다. 동료 멤버 김영석은 “해철이의 노래가 계속해서 불려지길, 그로 인해 그가 계속 기억되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