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는 가라’ 할매처럼 입고, 할배 따라 사는 요즘 세대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 서러움이 있지 왜 없어. 그런데 그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서진이가 메뉴를 추가하자고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센스가 있으니 들어야죠. 우리는 낡았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편견이 있잖아요.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많이 오염됐어요. 이 나이에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되죠. 난 남북통일도 중요하지만, 세대 간 소통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60세가 돼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나도 67살은 처음이야.”
최근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영화 '미나리' 스틸컷 |
배우 윤여정이 여러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이다. 최근 온라인상에서는 ‘윤여정 어록’으로 불리면서 MZ세대(밀레니얼 및 Z세대)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윤여정은 4월26일 열린 제7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에서 한국인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상도 상이지만 솔직하고 위트 있는 수상 소감, 연륜에서 느껴지는 여유, 드레스 위에 항공 점퍼를 입은 패션 감각 등 그의 모든 것에 젊은 세대가 열광했다. 윤여정에 스며든다는 뜻의 신조어 ‘윤며들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선미, 아이유, 정려원, 현아의 그래니룩. /인스타그램 캡처 |
푸근하고 정겨운 이미지에 머물렀던 노년층이 최근 트렌드를 이끄는 주체로 나서고 있다. MZ세대는 자신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권위적이지 않은 태도,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지혜, 유행에 따르지 않는 패션 감각 등에 열광한다. 할머니와 밀레니얼의 합성어인 ‘할매니얼’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할머니 감성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라는 뜻이다. 또 자신의 SNS에 옛날 감성을 담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할밍아웃(할머니와 커밍아웃의 합성어)한다’는 말도 쓴다. 일명 ‘그래니룩(할머니를 뜻하는 granny에 look을 더한 말)’, ‘할미룩’ 패션도 인기다. 말 그대로 할머니 패션이다. 할머니들이 주로 입는 긴 기장의 카디건과 펑퍼짐한 바지, 화려한 꽃무늬 패턴의 치마,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니트 조끼 등이 해당한다. 가수 아이유, 현아, 선미, 블랙핑크 로제, 배우 정려원 등 셀럽들도 다양한 그래니룩을 선보여 화제였다.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덕출 역을 맡은 박인환이 춤추는 모습. /tvN |
할매니얼 열풍을 거세게 만든 건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윤여정뿐 아니라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빌레라’의 배우 박인환도 MZ세대의 큰 관심을 받았다. 박인환은 극 중 은퇴한 우편 집배원으로 70살에 어릴 적 꿈이던 발레에 도전하는 할아버지 덕출 역을 맡았다. 실제 나이 77살인 박인환은 극 중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발레 연습과 스트레칭에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의 도전기는 젊은 세대에 큰 감동을 줬다. 극 중에서 “요즘 젊은 애들에게 미안해서 해줄 말이 없다.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다 지나가 은호야. 할아버지가 살아보니까 그래. 지독히 힘든 일도 있었지.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 물론 살다가 안 넘어지는 것도 좋지. 근데 말이야, 넘어져도 괜찮단다” 등의 대사가 온라인에서 화제였다.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씨. /밀라논나 인스타그램 |
유튜브 시니어 스타도 할매니얼 바람에 큰 영향을 줬다. 원조 시니어 스타로 불리는 70대 할머니 박막례씨의 유튜브 구독자 수는 131만명이 넘는다. 박막례씨는 유튜브에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메이크업, 먹방, 음식 레시피, ASMR 영상 등 다양한 주제로 영상을 올린다. 비빔국수 레시피를 소개하는 영상 조회 수는 무려 910만 회가 넘는다.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씨도 대표적인 시니어 스타다. 유튜브 구독자 수는 81만명이 넘는다. 한국인 최초 밀라노 유학생이었던 그는 패션 바이어이자 디자이너이자 교수다. 페라가모나 막스마라 등 유명 브랜드의 한국 출시를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튜브 구독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연령은 20~30대다. 나이가 들어도 멋진 그의 패션 감각과 자기 관리 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젊은 여성이 많다. 장명숙씨는 패션 콘텐츠로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논나의 아.지.트’라는 고민상담 코너를 만들었다. 일과 연애, 결혼과 육아 등의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많아져서다.
두 사람의 유튜브 채널 댓글을 보면 유독 2030세대가 적은 글이 많다. “막례 할머니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밀라논나처럼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다”등의 댓글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이 젊은 층에 하는 조언도 온라인에서 화제다. 박막례씨는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치고 장구 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을 추는 거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다. 내가 대비한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고난이 올까 봐 쩔쩔매는 게 제일 바보 같은 거다” 등의 어록으로 유명하다. 장명숙씨는 “대접은 남이 해줘야 받는 거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등의 말을 남겼다.
지그재그 모델로 발탁된 배우 윤여정. /지그재그 |
‘할매할배’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시니어들은 광고업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윤여정은 지난 4월부터 20대들이 즐겨 찾는 쇼핑몰 ‘지그재그’의 모델로 나섰다. 지그재그의 고객 70%가 10~20대이고, 이전 모델이 한예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윤여정은 광고에서 “니들 마음대로 사세요”라고 한다. 실제로 MZ세대의 반응도 뜨겁다. 모바일 리서치 오픈서베이 ‘MZ세대 패션앱 트렌드 리포트 2021’에서는 전국 15~3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보면 응답자 74%가 지그재그의 윤여정 모델 발탁이 앱의 이미지 변화 및 구매 의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배우 유아인을 모델로 한 무신사(52%), 배우 김태리가 나온 에이블리(57%)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배우 나문희, 강부자는 최근 각각 햇반컵반, 리더스코스메틱 모델로 등장한다. /CJ제일제당, 리더스코스메틱 제공 |
전문가들은 MZ세대에게 사랑받는 시니어의 공통점은 ‘도전’과 ‘소통’하는 모습에 있다고 분석한다. 나이가 많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모습, 다양한 플랫폼에서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고 하는 모습 등에 호감을 느낀다. 또 시니어 열풍에는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진짜 어른’을 찾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심리가 작용했다고 본다. 살아온 삶의 경험을 나누고 거침없이 조언하면서 ‘꼰대’같지 않은 시니어에 열광하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4050세대의 ‘꼰대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윗세대인 6070세대에 호감을 느낀다고 봤다. 곽금주 교수는 “MZ세대에게는 부모님이나 직장 상사로 직접 부딪히는 4050세대가 ‘꼰대’로 느껴질 수 있다. 노년층은 직접 부딪히는 연령대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젊은 세대에게 노년층은 지혜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본다는 얘기다. 또 MZ세대에게 연륜에서 나오는 시니어의 자신감과 여유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봤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사는 청년들에게 노년층의 지혜와 경험, 도전 정신이 큰 위로가 된다고 설명했다.
글 CCBB 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