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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극은 왜 자꾸 관객을 무대에 올리나요?

연극에 대한 새삼스러운 질문들

요즘 연극은 왜 자꾸 관객을 무대에

'팰름시스트'

관객이 연극에 참여한다는 것은?

“7초의 침묵을 견디면 누군가 발언을 한다.” 최근 참석한 포럼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어떤 주제에 대해서 발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앞선 말을 듣는 순간, 연극하는 사람의 습관처럼 관객을 떠올렸습니다. 공연예술분야에 몸담고 있다 보니, 사전 정보 없이도 극장에 들어가 객석에 앉기 전에 이 작품은 관객 참여형이다, 아니다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대한 배우의 동선이 닿지 않을 좌석으로 피해 앉곤 하는데, 그것조차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몸은 비록 안전지대에 있지만, 나서는 관객이 정말로 한 명도 없어서 공연의 맥이 끊기면 어쩌나 하는 괜한 오지랖을 떨곤 합니다. 다행히 이런 우려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관객이 두 명 뿐이어서 내가 직접 무대에 올라가야 했던 때인데요. 다른 관객이 나이든 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거든요. 이때 무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마도 7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발언을 하기까지 7초가 걸리는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이고, 외향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3초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갑작스레 무대에 오르지 않겠냐는 요구가 있었던 공연들을 떠올려봤을 때, 관객들이 응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꺼이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들은 어느 공연에서나 존재했으니까요. 관객이 ‘관객으로서’ 연극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서 연극이 어떤 점에서 매력적일까요? 연극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현장성이 주요원인이라는 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각광 받는 예술 양식이 변해도 연극이 갖는 미덕은 현장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연극의 현장성은 과거에 느꼈던 현장성과 동일한 것일까요? 기술 중심 사회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간접 체험을 통해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빠르고 편리해진 방법으로 경험 수치는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역으로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경험을 쌓아가고자 하는 욕구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를 직접 대면하게 만드는 예술양식인 연극은, 보는 연극에서 체험하는 연극으로 현장성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연극은 왜 자꾸 관객을 무대에

'네이티브 스피커'

객석이 아닌 무대에서 관객이 수행하는 역할을 분류해보자면 ‘관객’, ‘참여자’, ‘작가’ 세 가지 정도가 될 것입니다.

관객으로서

관객이 관객으로서 무대에 있는 경우는 한 지인의 경험을 통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4년 전에 친구와 연극 <짬뽕>을 보러간 적이 있었어요. 무대 배경이 80년대 중국집이었는데, 불려나갔고, 음식을 주문해야 했어요. 진짜 식당에서 하는 것처럼 짜장면을 시키고, 먹고, 그 당시 가격인 300원을 지불했어요. 이 모습을 모든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굉장히 창피했어요. 그런데 재미도 있었고요."


- 현예솔(연출가, 극작가)

관객이 무대에 등장할 경우 공연장의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은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습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좁혀진 느낌이랄까요? 나도 이 공연에 함께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합니다. 지난 달, 구 서울역사에 자리 잡은 RTO공연장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연극이 올라갔습니다. 출연진이 외국인들인 공연으로 장면 중 하나가 ‘한국인 콘테스트’로 꾸며졌습니다. 테스트에 도전했던 관객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 저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상품도 타고요. 이렇게 참여하는 공연을 전에도 해 본 적이 있어요. 그때도 재미있었어요. 새로운 경험이 되어서 좋아합니다. 손을 빨리 들고 나간 것은 아무도 안 나갈 것 같아서요. 그럼 갑자기 어색해지니까요. 좋은 추억도 만들 겸 나가보았습니다."


- 송규성(부천에서 온 관객)

관객을 참여자로

관객이 무대에서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연극의 경우, 혹시 관객이 무대에 오르지 않는 불상사가 생길지라도, 극 전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리허설 진행에도 무리가 없고요. 그런데 관객이 관객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될 때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2014년에 있었던 <숙자이야기>(서울여성플라자아트홀봄)의 경우 관객들은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이 공연은 총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에서는 평택기지촌 할머니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극화한 연극을 직접 무대에 올립니다. 후반부는 관객이 참여자로서 무대에 올라 출연진들의 과거 삶에 개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극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고 관객은 개입하고자 하는 지점에서 극에 참여합니다. 참여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길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후반부를 토론으로 이어가는 공연도 있습니다. 지난봄에 있었던 극단 동의 <쉬또젤라찌>(대학로예술극장소극장)도 전반부는 극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앞서 갈등을 빚은 인물들의 선택에 대해서 관객과 활발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여름에는 ‘성노동자권리모임지지’가 만든 토론극 <똑바로 나를 보라2>(아리랑예술극장)가 서울변방연극제를 통해 관객을 만났습니다.

성노동에 대해서 여성학자, 도덕론자, 여성운동가 등으로 분한 배우가 의견을 피력한다. 이 공연은 관객도 토론의 참여자가 된다. 공연의 형식 자체가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날 함께 한 관객들은 새로운 관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의식은 무대 위 배우들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명사들보다도 훨씬 더 진보적이었다. 똑같은 공연이 다른 날 관람한 관객에게서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 <똑바로 나를 보라2>는 말 그대로 관객의 취향이 공연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전강희(한국연극 470호, 44면)

살펴본 것처럼,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의 극은 결과물이 매번 균질하지 않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결과물은 소비자를 만나기가 용이한 제도 속으로 포섭되지 않아요. 그래서 대체로 공연 기간이 짧은 편입니다. 준비 기간에 비해서 짧은 공연 횟수는 또다시 상업적인 이윤을 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관객 참여형 연극은 탈소비적인 예술형식으로 자리매김해가는 추세입니다.

요즘 연극은 왜 자꾸 관객을 무대에

'버려드릴까요?'

관객을 작가로

관객이 참여자인 경우, 리허설은 공연 전반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리허설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능한 셈이에요. 관객 참여형 연극 중 리허설이 전혀 불가능한 형식의 공연이 있는데, 관객이 참여자의 위치를 넘어 작가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때 연출가는 본연의 임무보다 기획자로서의 역할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관객이 작가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공연의 규모는 아주 작습니다. 결과물이 관객을 만나 교감하고 의사소통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공연도 자본주의 질서 안으로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소비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관객이 공연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전통적으로 행하는 과정과는 전혀 다릅니다. 작가인 관객이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놀이’라고 할 수 있어요. 타인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묻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혹은 서로의 몸을 인지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야기가 구축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 공연이 완성되어 갑니다. 


지난주, <버려드릴까요?>가 RTO 공연장에서 있었습니다. 이 공연의 관객은 회당 20명뿐입니다. 관객은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도달하기 까지 관객들은 이메일을 통해 관계자들과 연락했습니다. 관객이 지참할 것은 영수증 10장인데, 여기에는 지구에서 보냈던 삶의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탑승객들은 영수증에 적혀있는 품목 중에서 외계행성으로 꼭 가져가야할 품목 7가지를 선정하기 위해 토론을 합니다. 실제 배우들이 과정에 참여하여 관객과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극이 끝날 무렵 지구에 절대 버리고 싶지 않은 품목을 영수증에서 골라 종이에 적고 창문에 붙입니다. 다른 탑승자들이 선정한 품목을 훑어보다 창밖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데요. 가상과 현실이 섞이며 낯선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전진모 연출에게 이런 공연을 올리게 된 연유를 물었습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가져오고 싶었어요. 관객들에게서 직접이요. 희곡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한 것을 작품에 담고 싶었습니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연이 나오네요. 내일은 또 어떻게 될는지."

- 전진모(연출가)

요즘 연극은 왜 자꾸 관객을 무대에

'팰름시스트'

지금까지 소개한 공연들은 모두 블랙박스에서 이루어진 공연입니다. 이에 반해 ‘얼라이브아츠코모’의 홍은지와 김지현이 만든 <팰름시스트>(인천아트플랫폼 E동)는 레지던시 숙소 공간에서 진행한 공연이입니다. 이들은 숙소 안에 2층 침대 네 개를 놓고, 각각의 1층에 과거의 순간을 회상할 수 있는 사물들을 놓았습니다. 어떤 소리와 영상도 한 쪽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관객은 이 공간 안에 혼자서 15분 동안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놓여있는 몇 가지 소품들을 보면 어떤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지어내게 됩니다. 저 드레스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왜 저 신발은 나란히 있지 않은 걸까 등의 의문점이 생겨납니다. 홍은지 연출가는 “관객이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누군가가 주입하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라고 이야기합니다. 15분의 시간을 통해서 온전히 나만의 것인 경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이야기 짓기 놀이를 했던 것처럼이요.


관객이 연극에 참여하는 방식을 ‘관객, 참여자, 작가’,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연이 완성되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연습실에서는 배우들끼리의 교감, 스태프들 간의 호흡에 신경을 씁니다. 그래야 관객에게 좋은 무대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진짜 좋은 무대였다고 느끼는 순간은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입니다. 나의 공연이 그들의 것이 되는 순간이지요. 물론 전통적인 형식의 연극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관객을 무대에 올리는 경우는 이 가능성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해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새로움을 경험하는 사람은 관객도 있겠지만, 결국은 만드는 사람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전강희 연극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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