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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없는 도전, 일등 없는 성취, 무대는 나의 힘

사람과 사람: 문화 인

#배우 #양희경 #자기앞의생

 

30여 년간 무대와 TV를 넘나들며 활약해온 배우 양희경이 연극 <자기 앞의 생>으로 3월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선다. <자기 앞의 생>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프랑스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로맹 가리(1914~1980)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차별과 폭력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무게를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양희경은 비슷한 연령대의 주인공 로자 역을 맡아 자신의 대표작 <늙은 창녀의 노래>의 한물간 작부처럼, 모성애와 같은 따뜻함으로 다시 한 번 외로운 이들을 보듬는다.

한계 없는 모성애를 그리다

실패 없는 도전, 일등 없는 성취,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 속 목포의 유곽 거리 ‘히빠리 골목’에서 몸을 파는, 걸쭉한 남도 사투리를 쏟아내는 중년의 창녀가 나이 들면 연극 <자기 앞의 생> 속 파리 빈민가에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창녀 출신 유대인 보모 할머니 로자가 돼 있지 않을까. 꾸준히 무대 위에 오르며 존재감으로 캐릭터에 서사와 입체성을 불어넣는 배우는 얼마나 소중한가. 양희경은 1990년대 <늙은 창녀의 노래>로 연극계를 풍미했고, 2019년 현재 <자기 앞의 생>에 출연하며 한국 여배우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시대, 나라 등 배경이 달라도 인물들을 하나로 꿰는 비법을 안다. <늙은 창녀의 노래>의 창녀는 스무 살 무렵에 창녀촌에 속아 들어와 20여 년을 보냈지만 회환에 잠기기보다 자신을 찾아오는 외로운 이들을 보듬는다. 로자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랍계 소년 모모를 비롯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키운다. 그는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외로운 이들을 품고 또 품는다.

 

로자는 3월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립극단 2019 시즌 첫 작품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이다. 개막을 나흘 앞두고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양희경은 로자 할머니 같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1995년 <늙은 창녀의 노래>를 초연했을 때 캐릭터보다 한 살 위였어요. 이번에는 로자보다 제가 두 살 아래예요. 두 캐릭터를 모두 비슷한 나이에 연기하는 거죠. 모두 다른 인물이고, 각각 대한민국과 프랑스 파리의 이야기지만 비슷한 점은 있어요. 사람들의 삶이 다 엇비슷하다는 거죠.”

 

<자기 앞의 생>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프랑스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계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로맹 가리는 원칙적으로 2회 수상이 금지된 공쿠르상을 유일하게 2회 수상한 작가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받았던 가리는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낸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 번 공쿠르상을 받았다. 하지만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아 극심한 심적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심지어 생전에는 그 자신인 에밀 아자르와도 비교됐으며,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후에 그가 아자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편견에 갇힌 사람들을 향해 펀치를 날렸다.

 

연극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 작가 겸 배우 자비에 제이야르가 소설을 각색해 2007년 초연했다.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연극상인 몰리에르에서 최고작품상, 최고각색상, 최우수연기상 등 주요 부문을 석권했다. 국내 관객에게는 국립극단이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예전에 <자기 앞의 생>을 읽었다는 양희경은 지난해 9월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은 뒤 “한 달 넘도록 생각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과연 로자 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죠.” 로자는 삶의 고초를 온몸으로 겪었다.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인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창녀 생활을 했고, 파리 빈민가에 산다. 보통의 유대인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무슬림 아이 모모와 같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모모의 삶을 지탱해준다. 혈육이 아닐뿐더러 인종, 종교, 세대 등 모든 사회적 기준이 다른 모모를 품는다. 

 

원작 소설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다양한 사연이 얽히지만 연극에는 로자와 모모를 포함해 이웃집 의사 카츠, 모모의 친아버지인 유세프 카디르 등 네 명의 캐릭터만 나온다. “로맹 가리의 팬이 많잖아요. 희곡도 나름의 색깔과 매력이 있지만 소설과 비교당할 부분이 많죠. 이 희곡으로 어떻게 호소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됐어요. 결국 로자 역과 희곡에 설득당해 출연하게 됐지요. 로자와 나이대가 비슷하니, 동년배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뽑아내려고 해요.”

 

사실 양희경의 모성에는 한계가 없다. TV 드라마에서 이모나 고모 역을 주로 맡았지만 무대에서는 다르다. 연극 <민자씨의 황금시대>에서는 철없는 엄마지만 삶의 희로애락과 모성애를 아는 민자를 연기했다. 1990년대 인기를 누린 작품으로 양희경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모노극 <늙은 창녀의 노래>의 한물간 작부는 모성애가 느껴지는 따뜻함으로 외로운 이들을 품었다. 언니인 가수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 뮤직비디오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절절한 모성애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자기 앞의 생>에서는 그동안의 모성애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준다.

배우는 공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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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기 앞의 생' 연습 모습.

<자기 앞의 생>은 극단 사개탐사의 박혜선 대표가 연출을 맡아 힘을 싣고 있다. 캐나다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2007년까지 극단 전망의 연출부로 활동한 박 연출은 2008년 극단 사개탐사를 창단, 남성 중심의 서사가 지배적인 연극계에 꾸준하게 균열을 내왔다. <억울한 여자>, <아내들의 외출>, <엄마의 이력서>, <신의 아그네스> 등 여성 중심의 서사가 그 예다. 하지만 단지 여성 서사를 꺼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자기 앞의 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양희경 역시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더라도, 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강조한 단어는 ‘식구’(食口)다. 말 그대로 ‘집 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이다. 

 

양희경은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같이 나누고 살면 그것이 가족 아니겠어요”라고 한다. 그는 앞서 다른 작품에서도 이상적인 ‘대안 가족’ 형태를 봤다. 낯선 두 할머니가 개, 고양이, 닭 등과 함께 혈연관계가 아닌데도 식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다.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삽입곡을 편곡해 만든 노래 <넌 아직 예뻐>를 양희은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자기 앞의 생>의 로자와 모모도 일종의 다른 대안 가족이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엄청나게 대립하잖아요. 로자와 모모는 종교를 비롯해 인종, 세대 등 모든 것을 초월해요. 배경을 떠나 온전히 인간애,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죠. 그것을 온전히 보여주자는 마음이에요. 로자처럼 깊고 넓은 사랑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죠. 처음에는 연구를 많이 했는데 곁가지를 다 쳐내니 ‘결론은 사랑’이더라고요.”

 

일상에서 양희경의 사랑은 ‘밥의 힘’을 기반으로 삼는다. 최근 종영한 가족 예능 프로그램 <볼 빨간 당신>에서 보여준 ‘집밥의 힘’이 그 예다. 아흔 살 모친을 위해 보리야채샐러드와 라타투이 등 건강식을 손수 만들어 주목받은 그는 연극, 방송, 라디오 등을 오간 전성기 때도 두 아들을 위해 매일 집밥을 했다. “아들들을 방목하더라도 눈앞에 둬야 했죠.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하니, 밥이라도 제대로 해 먹이자는 생각이 컸어요. 언제 돌아와도 집에는 ‘맛있는 밥’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맛있는 밥과 반찬을 만들어놓았죠. 그리고 아이들을 믿었어요. 무슨 일을 겪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요. 호호.”

 

큰아들 한원균 씨는 무대 조명 디자인을 하며, 작은아들 한승현 씨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양희경은 ‘두리반’(식구들이 함께 둘러앉아 식사하는 크고 둥근 소반) 앞에서 밥 먹는 풍경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정이 있어요. 그 먹을거리를 만드는 엄마는 참 대단하죠.” 이처럼 엄마의 위대함을 증명한 양희경은 많은 엄마들이 스스로 ‘지금까지 한 일이 하나도 없네. 삶을 잘못 살지 않았나’라고 자책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니, 왜 한 게 없어요”라며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음정을 높여 말했다. “애들 결혼할 때까지 잘 키우고, 잘 먹이고 잘살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 중 하나 아니겠어요. 본인들의 일을 너무 폄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일은 없어요. 

 

남자들도 자식을 낳아야 압니다. 물론 가정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남편의 바깥 생활 노고를 알기 힘들 수도 있죠. 서로의 고충을 알기 위해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역할 바꾸기를 한 번 시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면 서로 ‘당신이 한 일이 뭔데?’라며 역정을 내지는 않을 겁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인 것처럼 연기가 배우의 일인데, 연기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 공감하는 능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배우는 일상에서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연극 무대는 ‘연기의 집밥’을 먹는 곳

실패 없는 도전, 일등 없는 성취,

연극 '자기 앞의 생' 홍보 이미지.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양희경은 1981년 연극 <자 1122년>으로 데뷔했다. 육아로 잠시 쉬다가 1985년 연극 <한씨연대기>를 통해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 <늙은 창녀의 노래> 같은 연극, 양희은과 함께 출연한 <어디만큼 왔니>를 비롯해 <넌센스> 등 뮤지컬뿐 아니라 <목욕탕집 남자들>, <하얀거탑>, <누나>, <넝쿨째 굴러온 당신>, <달자의 봄>, <이별이 떠났다> 등 다수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특히 명작으로 평가받는 드라마 <하얀거탑>에서는 부원장 우용길의 아내이자 ‘의사부인회’ 회장인 홍성희 역을 맡아 비중은 작지만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양한 TV 출연작 중에서도 발군은 1990년대 초에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 영화 <미저리>의 미친 간호사 애니 윌크스(케시 베이츠)를 패러디한 광기 어린 연기는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양희경은 본인은 누구에게 배워서 하는 일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요리도 요리 교실에서는 배우기 힘들더라고요”라며 깔깔댔다. “창의적인 직업이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가 천직이죠. 요리 비법을 따로 정리하지 않아도 요리를 하다 보면 손에 배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듯 연기 역시 마찬가지죠.”

 

그가 캐릭터를 해석해내는 비법은 대본을 본 뒤 처음 그에게 찾아오는 느낌대로 가는 것이다. 드라마 <달자의 봄>에서는 주인공의 표독스러운 직장 상사 ‘강 팀장’을 연기했는데 작가가 본인이 그렸던 캐릭터 그대로라며 찬사를 보냈다. 작가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인물을 상상하며 강 팀장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양희경은 당시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일도 해야 하는 ‘워킹맘’ 강 팀장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새겨 넣었다. 양희경은 “감을 믿어야 해요”라며 웃었다.

 

이렇게 TV 드라마에서 각광받는 등 바쁜 스케줄을 보내면서도 양희경은 고향과 같은 연극 무대를 꾸준히 찾았다. 장민호(1924~2012), 백성희(1925~2016), 윤소정(1944~2017) 등 선배 연극인들의 빈소와 영결식에도 빠지지 않았다. “백성희, 윤소정 같은 선배님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박정자, 손숙 선배님처럼 저 역시 오래 무대에 서고 싶어요. 그분들 덕분에 연극계가 지켜지고 있죠.” 하지만 그가 먹고 힘을 내는 ‘연기의 집밥’과도 같은 연극계가 더 힘들어졌다는 진단도 내놓았다. “예전과 환경이 같아요. 받는 돈도 같고, 열악한 환경도 같죠. 사회는 발전했다고 하니 같은 게 아니라 더 열악해진 거죠. 공연 장르 중 뮤지컬 팬은 그나마 있어요. 그런데 연극 팬들은 차츰 더 줄고 있죠. 그러다 보니 배우들은 방 한 칸도 제대로 못 구해요. 집을 산다고요? 그건 남의 나라 이야기와 같죠.” 노장 배우와 신인들을 잇는 허리 배우들은 대가 끊긴 지 오래다. 연극판에서 기반을 다진 뒤 영화와 드라마로 옮긴 배우들이 연극계로 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극계의 기반이 더 탄탄해지고 지원환경이 더 풍성해져야 한다. “영화와 TV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 연극 활동 병행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양쪽이 균형 있게 잘 융화됐으면 해요.”

 

양희경은 1980~1990년대 연극계의 전성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한씨연대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이 작품을 올린 연우무대는 이후 <칠수와 만수> 등 흥행작을 연달아 내며 여러 개의 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양희경은 <늙은 창녀의 노래> 출연 당시 드라마, 영화도 촬영했으며 라디오 진행과 TV 출연도 병행했다. 

 

그는 연극의 부흥기를 다시 꿈꾸며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1년에 한 편씩 무대에 꼭 올랐다. 하지만 몇 년 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에 매일 라이브로 공연해야 하는 연극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3년간 연극을 쉬었다. 그러다 지난해 영국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1890~1976)의 원작이 바탕인 <쥐덫>으로 연극에 복귀했다. 그가 맡은 보일은 2막 중간에 사라지는 역이라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이번 로자 역은 국립극단 시즌단원인 이수미와 나눠 맡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 있어야 해 부담이 제법 크다. 그는 13회 무대에 오른다. “아직도 두렵고 무서워요. 여전히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연극이 좋으니까, 로자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으니까 잘해내야죠.” 카랑카랑한 특유의 웃음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실패 없는 도전, 일등 없는 성취,

글 이재훈 뉴시스 기자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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