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디자이너 양지윤
좋은 디자인의 중심에 ‘자연’을
환경문제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다. ‘친환경’ ‘자연주의’를 강조하는 제품이 호응을 얻고 재료를 재활용·재사용해 탄생된 제품 및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는 가운데, 일상에서 자연을 아끼고 생각하고 실천에 이르도록 ‘경험’을 선사하는 디자인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른바 ‘그린디자인’이다.
나는 곤충과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소녀였다.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길에 핀 꽃과 예쁜 돌멩이, 신기한 곤충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관찰하다 돌아왔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는 그날 관찰하고 느낀 것들을 스케치북에 그려 엄마에게 자랑한 기억이 있다. 아마 이 시절에 자연친화적인 감수성이 생겨난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스무 살에 미대에 입학했다. 매체에서 그려내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한 큰 환상이 있었고 부지런하게, 때론 밤샘 작업도 하면서 학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점이 끝난 과제로 가득 찬 쓰레기통을 보며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밤을 새우며 돈과 에너지를 잔뜩 들여 만든 결과물인데, 채점을 마치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돼버리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날 이후 학교 밖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린디자인, 환경을 일상으로 초대하기
환경을 주제로 전시하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 ‘그린원’ 활동을 시작했다. 그린원에서 매주 환경문제에 대해 스터디하고, 우리 생활에서 작은 힘을 들여 실천할 수 있는 친환경적 행동을 공유하며 실제 실천으로 옮겼다. 그때 느낀 것은 개개인이 직접 풍력발전소를 세우거나 대체 에너지를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일상에서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부터 하는 것이 환경을 위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 쿠부치 사막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연 전시에서 ‘그리닝(Greening)’ (사진3)이란 이름의 카드로 구현되었다. 이 카드를 열면 팝업 형태로 벌거숭이 나무가 나타나고 그 위에 ‘나 [ ]는(은)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사용하겠습니다.’라는 문장과 환경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적혀 있다. 실천에 옮길 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초록색 지장을 나뭇가지 위에 찍으면 초록 잎사귀가 생기면서 나무가 살아나는데, 이는 우리의 작은 손길(행동)이 나무 한 그루, 나아가 자연을 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닝은 전시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국제 공모전 ‘Green Earth’(디자인 전문 사이트 디자인붐, 일본디자이너 협회 주최)에 출품해 운 좋게도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는 ‘그린디자이너’라는 타이틀과 함께 다양한 작업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2008년)는 그린디자인이 떠오르고 주목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유명 해외 디자인 사이트에서 그린디자인 공모전 대상 수상은 꽤나 파급력이 컸던 것 같다. 2010년 TV 커머셜 광고에 사용되었을 만큼 큰 관심을 받았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지만 어떤 타이틀을 얻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영국으로 어학연수 겸 여행을 떠났다. 작은 어촌이었는데 집집마다 넓은 정원이 있고 마을에 숲이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정원에 나가 식물을 관찰하거나 숲길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연을 가슴으로 느끼고 소중함을 아는 것이 어쩌면 환경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도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음 작업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오브제에 자연의 소중함을 녹여내 우리의 감수성에 스며드는 제품을 기획하기로 했다. 2012년 12월 ‘마치(MARCH)’라는 브랜드로 디자인 페스티벌의 ‘신예 디자이너’로 선발, 전시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친환경 디자인의 수요와 가능성은 확대되는 중
마치의 제품으로 벌레 먹은 나뭇잎에 맺히는 햇살에서 영감을 받은 노트 ‘햇살의 모양’(사진1)이 있다. 이 노트 커버에는 나뭇잎이 형압으로 표현돼 있고 벌레 먹은 듯 구멍이 나있다. 노트를 열면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이 첫 번째 페이지에 맺혀 햇살의 모양을 볼 수 있다. 일상에 가득하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자연의 아름다움을 디자인에 녹여내고 싶었다. 두 번째 작업은 씨앗카드(사진2)다. 무언가를 유심히 응시하는 소녀의 형상, 그가 디딘 발 아래에 씨앗이 부착되어 있다. 이 소녀를 흙에 세워주고 물을 주면 그 아래 있는 씨앗이 발아하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소녀가 새순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 이들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라며 디자인했다.
친환경 디자인은 재사용, 재활용, 재료의 최소한의 사용, 또는 표현 주제에서 친환경성을 드러내는 것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적정 소비자 가격 그리고 대중성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디자인으로 공유하며 생분해, 재활용, 재사용을 소재의 콘셉트로 하고 계속 ‘좋은 디자인’에 대해 고민한다. 워낙 카테고리가 많고 유행은 빠르기 때문에 흔들릴 때도 있다.
환경을 소재로 한 작업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고 니즈(needs) 역시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재활용, 친환경 소재는 일반 소재보다 가격도 비싸고 주로 수작업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비자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창업 초기에는 친환경 브랜드로서 경쟁력을 얻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게 불가피한데, 작업실이나 초기 사업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마련되면 좋겠다. 작가 레지던스인 신당창작아케이드처럼 ‘그린디자이너’에 대한 공간 지원 기회가 확대되면 이를 토대로 창작자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전시도 하면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해외에서 개발된 친환경 신소재를 함께 수입하거나 소재 스터디 등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에 힘을 모은다면 더 큰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글·사진 양지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공간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환경문제를 주제로 전시하는 동아리 활동 중 해외 공모전 대상 수상을 계기로 디자이너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