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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에 중독된 일본 경제, 엔저에 불안한 한국 경제

SUMMARY

- 금리 못 올리는 일본에 커지는 美·日 금리차

- ‘인플레이션 불씨 꺼질까’ 걱정에 日 정부·은행 제로금리 유지

- 심화된 엔저에 한국 기업 수출 경쟁력 하락 우려 존재

- 반면교사 삼아야 할 1997년 외환위기, 强달러·弱엔화 경험

 

© istock

 

탈(脫)코로나 이후 일본으로 여행가는 한국인이 많아졌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국인들이 느끼기에 일본 체감 물가가 싼 이유가 크다.

한국인 입장에서 일본 물가가 싸게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일본 물가가 진짜로 싸다는 것. 30년 동안 디플레이션 늪에 빠져 있다 보니 물가가 크게 오를 일이 없었다. 2022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에도 일본만 ‘나 홀로 제자리걸음’이었다. 일본인에게는 비극적 상황이지만 수십 년 물가 상승을 경험한 한국인에게는 신기하다. 30년 전 가격이나 지금 가격이나 다를 게 없으니

두 번째는 환율이다. 최근 들어 강력한 요인이 됐다. 100엔의 엔화를 바꾸려면 이달 초 900원이 필요했다. 석 달 전에는 1,000원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에 10% 가까이 떨어진 것. 100엔당 800원 선으로 떨어진 것은 2015년 이후 거의 8년 만이다.

 

100엔 대비 원화 환율. 출처 : 네이버금융

 

국내 관광지 바가지 상혼에 이력이 난 한국인에게 요즘 이때만큼 일본 여행하기 좋을 때도 없다. 엔화와 엔화 자산에 대한 투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개인에게 좋을지 몰라도 지금의 엔저 상황은 나라 경제에는 부정적이다.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수출 품목이 겹치는 일본 기업의 상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져서 그렇다. 한국은 BTS 보유국이지만 수출 시장에서는 일본에 밀리는 게 현실이다. 1980~1990년대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한국 상품은 여전히 일본 제품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도 일부분 엔저 현상에서 비롯됐다.

 

엔저를 포기하지 않는 일본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1990년대 말부터 엔저를 용인했다. 골자는 간단하다. 금리를 낮추고 엔화를 풀었다. 1990년대 말 일본의 기준금리는 이미 0%가 됐고 2000년대 들어 일본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 양적완화의 원조가 일본은행인 셈이다.

국제 수요가 뒷받침된 엔화를 보유한 부자나라 일본이었기에 가능한 정책이었다. 엔저를 위한 양적완화라는 것이. 문제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의 디플레이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잃어버린 30년’ 소리까지 듣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나 2010년 유럽재정 위기 때도 엔화는 출렁이곤 했다.

2013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재집권하고 좀 더 양적완화를 하면서 엔저는 고질화됐다. 아베 전 총리의 양적완화 파트너인 구로다 히로히코 전 일본은행 총재가 같은 해(2013년) 선임되면서 더 과감해졌다. 회사채 매입 규모를 늘렸고 2016년 1월 마이너스 금리를 제한적으로 도입했다. 당좌예금에 0.1% 마이너스 금리를 붙이는 식이었다.

2016년 9월에는 수익률곡선제어(YCC)라고 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을 도입했다. YCC는 중앙은행이 시장 금리를 낮추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하는 방식이다. 시장금리를 0%대로 낮추기 위해 대량 현금을 살포하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된다. 일본은행은 10년 만기 채권 금리 목표를 0.25%로 뒀고, 이를 고수하기 위한 대량 매입에 들어갔다. 채권 수요를 늘려 채권 가격을 낮추는(채권 금리 하락) 원리다. 일본은행은 본의 아니게 일본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최대 매입자가 됐다.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 추이. 출처 : 인베스팅닷컴

 

채권 시장 내 특정 상품의 금리를 0%대에서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거의 막장’에 다다랐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시장 교란자를 넘어 시장 지배자를 중앙 기관이 자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디플레이션 타파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지가 강했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노렸던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인플레이션 유발 효과, 두 번째는 수출 기업들의 실적 개선이었다. 국민 소득이 늘고 소비가 증가한다면 경기는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출처 : 자본시장 포커스 2023년 11호, '일본은행의 우에다 체제 출범 및 통화정책 방향'

 

엔저와 일본 정부의 딜레마 2023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목표는 완수됐을까? 인플레이션은 유발된 듯하다. 다만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 노력의 결과인지, 원자재 등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일시적 효과인지 분명치가 않다. 문제는 20년 넘게 양적완화를 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금리를 제로로 내리고 인위적으로 돈을 푼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직접 개입해 ‘시장 플레이어’처럼 움직인다는 게 정상은 아니다.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 가격이 있는데 정부가 직접 나서 가격을 조정하려고 하면 암시장이 생길 수 있다. 공매도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시장 실패 요인이다.

특히 미 연방준비제도가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일본 국채 금리만 낮게 유지하기 힘들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듯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미국 금리가 상승하던 2022년 일본은행이 매입한 채권 규모는 크게 늘었다. 2022년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액은 약 111조 엔으로 YCC 정책을 도입한 2016년(119조엔) 이후 최대 규모다.

올해에는 일본은행의 채권 규모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2023년 1분기에만 일본은행은 44조 엔의 국채를 매입했다. YCC 정책 도입 이후 분기 평균 국채매입액 22조엔을 크게 상회한 수치다. 미 연준이 하반기 2차례 정도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은행의 매입 규모는 더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제 일본 국채 시장은 일본은행 없이는 운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기형적 시장이 됐다. 국채 발행량 중 일본은행이 보유한 비율은 올해 50%를 넘겼다. 미 연준의 보유 비율이 17% 정도이고 한국은행이 3%란 점을 고려하면 ‘뭔가 잘못됐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국채가 발행된 만큼 일본 정부의 채무 부담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의 부채 규모는 GDP의 260%를 넘어선 상황이다. 2022년 기준 일본 정부가 쓴 예산 중 4분의 1인 24조 3,393억 엔이 국채 이자비로 지급됐다.

 

일본은행 앞으로도 엔저는 계속 정부가 빚을 내면 일본은행이 받아주는 상황은 언제쯤이면 바뀔까. 2023년 4월 일본은행 새 총리로 우에다 가즈오가 선임됐다. 엔화를 무지막지하게 풀어 디플레이션을 타파하려던 기존 정책이 바뀔까 시장의 기대가 컸다. 정책 흐름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미세한 변화나 힌트를 줄 것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행의 숙원 목표 중 하나였던 인플레이션 목포도 2%대를 넘었다. 4%대를 향해 올라갈 정도다. 엔화 약세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어쨌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숙원이 현실화된 듯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그러든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6월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존 확장적 재정 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추가 완화 가능성마저 시사했다. 언제든 디플레이션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을 했다. 30년 묵은 디플레이션은 그만큼 고질적이었다.

금리 인상을 용인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일본정부가 진 채무 부담이다. 긴축에 동반된 금리 상승은 필히 일본 정부의 이자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일본 정부는 세수를 늘리거나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데, 둘 다 일본 내수 경제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극약 처방과 같은 양적완화에 중독돼,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게 된 게 일본 경제의 현실이다.

 

엔화 약세와 한국 경제 엔화 약세의 지속은 한국 경제에는 부담이다. 연합뉴스는 지난 6월 20일 ‘8년 만의 기록적 엔저...달갑지 않은 수출 기업들’에서 엔저 현상은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기업 등에 타격을 준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 1~3분기 기준 달러 대비 엔화가 달러 대비 원화보다 5.86%포인트 더 많이 하락했다. 이에 다른 엔저 현상으로 한국 수출은 168억 달러가 감소했다. 한국무역협회는 엔저 현상이 길어질수록 한국 수출 회복에는 불리하다고 봤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엔화 환율에 따라 한국 기업들의 실적은 갈렸다. 1980년대 한국이 3저 호황을 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85년 플라자합의에 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엔화 평가 가치를 절상시켰고 이게 한국 수출에는 호재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전조는 엔저 현상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5년 디플레이션 초입에 들어선 일본 경제는 엔화 가치 절하에 나섰다. 이른바 역플라자합의다. 그해(1995년) 5월 G7 국가들은 달러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엔화 가치 하락을 용인키로 했다. 엔화 가치 하락과 달러 강세가 겹치면서 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국에 외환 위기가 연쇄적으로 초래됐다. 안전할 것이라는 한국 경제도 1997년 말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1990년대 한국경제와 2020년대 한국경제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상황적으로 봤을 때 결코 유리하지 못하다. 미 연준이 금리를 올리고 달러를 거둬들이는 동안 달러 강세가 나타났고, 그에 겹쳐서 엔화 약세가 극명해졌다.

이 상황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일본 간 금리 차이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달러 강세, 엔화 약세는 더 두드러질 수 있다. 일본과 경쟁하며 수출해야 하는 한국 기업에게는 결코 반가운 상황이 아니다.

최근 한국 경제는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시황 악화 속에서 수출 부진이 장기화되는 국면이다. 한국의 월간 수출은 지난해 10월부터 8개월 연속 감소(전년 동월 대비) 감소했고 무역 적자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긴 1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지표만 놓고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버티는 일본, 그걸 바라보는 한국 8월이면 일본은행의 통화정책회의가 열린다. 우리나라 기업 입장에서는 미 연준의 공개시장위원회(FOMC)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쉬운 점은 연준과 일본은행의 입장 변화가 극적으로 있기 어렵다는 데 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고 대비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국내 주식에 대한 투자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업 실적이 올해 하반기 부진할 것으로 예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과 겹치는 수출 주력 기업에 대해서는 특히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더 큰 비극은 일본에 있다. 임시적이면서도 임의적으로 쓰여야 할 극약처방인 양적완화가 상시로 운영되어야 하는 게 오늘날 일본 경제의 현실이다. 노령화 속도가 빠른 한국도 이와 무관치 않으나 우리로서는 전 국가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남은 듯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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