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뒤 가려진 진실
어느 남녀의 입맞춤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향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있는 두 학교의 나지막한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담벼락 끝머리에 다다르자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 하나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한 발짝 앞서 걷던 몇몇 사람들은 곧장 분주한 손놀림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한 풍경을 뒤로 한 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주름이 가득한 백발노인이 되었을 때, 나의 연인도 저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봐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서 미래의 사랑까지 확신 받으려 하는 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여나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작가를 찾습니다”
나를 혼란에 빠뜨린 이 벽화는 어느 이름 모를 작가가 4년 전에 그려 놓은 작품이다. 시간이 흘러 벽화 일부가 갈라졌고, 바스러질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를 알게 된 담당구청에서는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작가를 수소문했다.
공공미술과 마을산업
어린 시절의 나는 미술 시간만 되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실습시간마다 주어지는 과제는 전쟁터에 던져진 폭탄과도 같았고, 머리는 망치로 한 대로 맞은 것같이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그런 상태는 수업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으며,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도화지와 어떤 미동도 없는 미술도구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친구들이 모든 것을 끝내고 뒷정리를 할 때야 나는 서서히 과제를 시작하곤 했다.
결코, 좋은 추억이 아니었음에도 미련한 나는 미술에 미련을 품었다. 채우지 못한 아쉬움은 일상의 작은 틈을 지배했고 바닥에 그어진 선이, 벽에 그려진 그림이 애써 외면하려는 나를 붙잡았다. 삼청동에서 어느 남녀의 벽화를 마주했을 땐 그림을 그린 작가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개인이 소유하는 캔버스가 아닌 공공이 소유하는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의 영향력은 꽤 긍정적인 편이다.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에게 열린 예술은 남녀노소,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도시재생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마을사업으로도 자리매김하여 낙후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상권을 활성화하는데도 영향을 미친다.
동피랑 마을의 운명
2007년 통영 동피랑 마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시재개발을 위해서 마을을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시민단체가 전국 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을 포함하여 18개 팀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동피랑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다. 벽화의 아름다움이 많은 이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마을의 운명은 철거가 아닌 보존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라질 뻔한 작은 마을에 그려진 벽화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방문객이 모여들었고, 그러한 현상은 마을의 ‘관광화’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이후 동피랑 마을의 벽화사업은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국 여러 지자체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벽화사업을 진행하였다. 예산과 시간을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아래 시작된 사업 대부분은 사후 보존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이뤄졌다. 그 결과 벽화 중 일부는 도심 속 흉물로 방치되는 형편이다. 일련의 과정은 재개발만을 부르짖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도시 내 사회적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중점을 두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던 정비사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출처: 테마여행이야기 |
슬프게도 동피랑 마을은 예정된 결과를 피해 가지 못했다.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연합회는 벽화사업을 주도했던 ‘ㅍ’ 시민단체가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시민단체나 주민과 교류가 없었으므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시가 의도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명목으로 마을기업을 설립한 이후 몇몇 주민은 상인이 되어 기념품과 식음료를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립된 지 1년 만에 미숙한 운영이 드러났고, 마을이 관광지로 변모하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견디지 못한 일부 토박이 주민이 집을 팔고 마을을 떠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서울 이화동 벽화마을을 들 수 있는데 마을의 상징 같은 벽화를 지워버린 건 외부인이 아닌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그 모든 상황이 재개발로 인해 원주민이 쫓겨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그리고 이면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도시재생의 성공사례로 소개되는 현실은 과연 바람직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도시재생을 위한 벽화 마을사업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연계되어 발생하는 여러 현상과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가능한 한 많이 세워둘 필요가 있다. 벽에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만 보고 모른 척 지나쳤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는 대처가 늦어질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재생을 이끌어갈 수 없다. 벽화 마을사업이 도시를 재생하기 위한 시도로서 종착점이 아닌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업 유지 및 관리를 위해 행정기관과 주민 공동체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벽화를 시작으로 더욱 나은 환경을 갖추고, 주민 스스로 지역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을 확인한다면 그 누구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끝으로 순환하는 행정 시스템 안에서 정치적 관행을 일삼는 일부 공무원이 주체적 소통 관계였던 일부 커뮤니티와 주민들의 연계를 방해하고, 마을을 관광사업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디터 이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