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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의 스토리텔링, 팬덤을 관통하다

‘엑소 플래닛’부터 시작…BTS로 진화


안무·음악·뮤직비디오·공연 이어져


K팝 그룹의 독창적 팀 컬러 형성


세계관, 정체성·메시지 입체적 전달…


캐릭터·영화·다큐 2·3차 콘텐츠로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에 유대감 형성


“세계관 빼도 음악으로 말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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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활한 협곡, 끝도 없이 펼쳐진 사하라 사막에 여덟 명의 소년이 뚝 떨어졌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의 시작. 아이돌 그룹 에이티즈(2018년 데뷔)는 “마음의 지도를 따라,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저마다의 가슴에 간직한 ‘트레저(TREASURE)’를 찾는 여정이 에이티즈가 던진 화두의 시작이었다.


#2.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소설 ‘데미안’ 중) 스토리텔러 남궁민은 “아이랜드는 아이돌의 꿈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며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동안 설계된 가장 완벽하고 진화된 생존경쟁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 데뷔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아이돌 그룹들이 ‘세계관 전쟁’에 한창이다. 애시당초 ‘철학 용어’였던 세계관은 게임, 영화로 영역을 확장하더니, 이제는 K팝의 필수요소가 됐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일본 아이돌 그룹들이 해온 사례가 있으나 영미 팝 시장에선 등장한 적이 없었다. 국내 아이돌 그룹이 취하고 있는 특성 중 하나다”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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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로 시작해 방탄소년단으로 진화=K팝에서 세계관의 첫 등장은 2012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초에 SM엔터테인먼트의 엑소가 있었다. 엑소는 팀명부터 세계관을 담았다. 태양계 외행성을 가리키는 ‘엑소 플래닛’에서 온 멤버들로 그룹을 결성했다. 엑소는 멤버 전원이 중력(디오), 바람(세훈), 결빙(시우민), 빛(백현) 등 각자의 초능력을 가졌다.


K팝 그룹의 세계관은 저마다의 스토리텔링으로 음악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팀의 컬러로 자리잡는다. 엑소의 팬덤이 아니라면 이들의 초능력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세계관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엑소의 안무와 음악을 가로지르고, 뮤직비디오와 공연으로 연장된다. 이것이 K팝 세계관의 기본이다.


엑소 시절엔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세계관은 방탄소년단의 등장과 함께 K팝 지형을 바꿨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방탄소년단의 대성공으로 ‘세계관 장인’으로 거듭났다. 실제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는 세계관을 짜는 팀이 따로 있을 정도다.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은 범우주적 스토리텔링을 벗어나 현실에 안착했다. ‘학교 3부작’ ‘청춘 2부작’ 등 현실 세계에 도입한 스토리텔링으로 그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방탄소년단의 ‘윙스’ 앨범은 소년들의 성장 서사를 담아내며 글로벌 인기에 불을 지폈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모티브로 한 앨범이다.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은 빅히트엔터테인먼트와 CJ ENM이 손 잡고 선보이는 보이그룹 결성 프로젝트 엠넷 ‘아이랜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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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발견, 성장, 구원…K팝 대표적 세계관=K팝 그룹이 즐겨 쓰는 세계관의 방향성은 크게 세 가지다. 자아의 ‘발견’과 ‘성장’이 흔한 편이며, ‘구원’에 초점을 둔 사례도 눈에 띈다.


2년차 그룹 에이티즈는 ‘자아의 발견’이라는 큰 틀 아래 ‘보물’를 찾는 여정으로 가요계에 첫 발을 디뎠다. 갓 데뷔한 아이돌그룹에겐 안성맞춤인 세계관이다. ‘트레저’라는 세계관 아래 발매한 총 5장의 앨범은 이든(EDEN)이 수장으로 있는 프로듀서팀 이드너리가 일관성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음악 작업을 해왔다.


소속사 KQ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에이티즈의 세계관은 앨범 몇 장에 국한되지 않은 ‘팀’의 세계관”이라며, “우리의 인생을 여정과 모험이라 규정하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와 각자의 삶 속 다양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하나의 큰 테마”라고 말했다. 이후 최근 발매한 ‘제로 : 피버 파트1’에선 K팝 그룹 최초로 세계관 프리퀄을 선보였다. 멤버들이 모이기까지의 고민 갈등 각오 등을 담아, “누구나 청소년기에 느꼈을 법한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을 다루며 내러티브는 탄탄하게 구축”했다. KQ 관계자는 “에이티즈는 ‘세계관’이야말로 음악과 퍼포먼스라는 핵심요소 위에 팀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달 데뷔한 YG 대형 신인 트레저 역시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그룹의 이름처럼 이들 역시 “나만의 보물을 찾겠다”는 세계관을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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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랜드도 ‘자아의 발견’과 ‘성장’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방시혁 빅히트 의장이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을 선보일 때부터 강조한 자아의 성장을 중심에 뒀다. ‘아이랜드’는 프로그램 자체가 거대한 생존 경쟁의 장이다. 세트장 중심에 위치한 대형 알 모양의 게이트가 세계관 구성의 핵심이다. ‘아이랜드’ 관계자는 “알의 안쪽은 아직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소년들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공간 ‘아이랜드’이며, 알의 바깥쪽은 팬들을 마주하며 아이돌 그룹으로서 꿈을 펼치는 곳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데뷔를 앞둔 FNC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피원하모니(P1Harmony)는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왔다. 미래, 과거, 현재 등 다른 차원에 흩어진 소년들이 분노와 폭력성을 극대화하는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지구를 구하고자 희망의 별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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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구축, 2차 3차 콘텐츠 확장…왜 세계관일까?=세계관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설정’이자, ‘콘셉트’다. 가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룹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하나의 세계관으로 보통 한 시즌당 3~5장의 앨범을 계획하며, 약 1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유지한다.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은 연작 앨범으로 확장됐다. ‘러브 유어셀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세계관 구축의가장 큰 장점은 독창성을 가지기 어려운 무수히 많은 그룹 안에서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어 특색을 갖추고, 이를 통해 팬덤을 확장한다는 점이다.


KQ 관계자는 “하루에도 수많은 아이돌이 데뷔하는 만큼 저마다의 독보적인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팬들에게는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에 대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팬덤을 더욱 공고히 한다”고 말했다. 정 평론가도 “3부작 시리즈로 이어지는 세계관이 일반적인 만큼 팬들의 경우 1편에서 흥미를 느꼈다면 2, 3편에서 퍼즐을 맞추고, 콘서트나 안무 등에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라고 봤다. 세계관에 대한 호기심은 일반 대중에게도 이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세계관이 코어 팬을 향한 유입 관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에 세계관을 담아낸 캐릭터나 영화, 웹툰, 출판, 다큐멘터리 등 2차, 3차 콘텐츠로 확장 가능성이 무한하는 것도 큰 장점이다. K팝 기획사가 세계관 구축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KQ 관계자는 “갈수록 다양성이 요구되는 문화 속에서 단순히 음악방송, 콘서트, 뮤직비디오과 같은 콘텐츠를 넘어서 세계관이라는 소스를 통해 아티스트의 스토리를 담은 추가 콘텐츠 제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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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티즈 역시 세계관을 담은 굿즈로 지구본, 나침반을 형상화해 선보이고 있으며, 이달 데뷔하는 남성 9인조 그룹 고스트나인은 최근 고스트 캐릭터인 ‘글리즈’(GLEEZ)를 선보였다. 방탄소년단은 이미 세계관을 바탕으로 웹툰( ‘화양연화 파트0 : 세이브 미’), 게임(BTS 유니버스 스토리), 캐릭터(타이니탄)로 확장했다. 피원하모니는 세계관을 담은 영화 ‘피원에이치(P1H): 새로운 세계의 시작’의 개봉(10월 8일)을 앞두고 있다. K팝 그룹의 영화 제작은 피원하모니가 첫 사례다.


피원에이치를 연출한 창감독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차별점이 있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우리의 이야기가 곧 모두의 이야기임을 증명하며 세계 영화 팬들의 인정을 받은 한국 영화와 그 결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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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등장은 수없이 쏟아지는 K팝 그룹들이 얼마나 차별점을 가지기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돌 그룹의 과도한 소비와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에 대한 우려다.


정 평론가는 “걸그룹에 비해 확장성은 떨어지지만, 팬덤을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보이그룹들이 주로 세계관에 집중하고 있다”라며 “세계관은 팬덤을 쉽게 모으기 위한 방편이자 상업적 수단이다. 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에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팬들에게 캐릭터성을 심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토리텔링을 아무리 잘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세계관을 빼고도 음악으로 말할 수 있는 그룹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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