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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피범벅 없는 'K복수극'을 미국, 프랑스에선 왜 볼까

격렬한 액션 없어 내수용 우려 샀던 '더 글로리'의 반전

9개국 넷플릭스 1위··· '장르물 천국' 미국, 프랑스 등서도 톱10

"학폭에 무감각해졌는데" 성찰 불러···평생을 관통하는 트라우마에 몰입도

한국일보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동은(송혜교)이 집 옥상에서 자라는 나팔꽃을 바라보고 있다. 김은숙 작가는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면 악마의 나팔꽃, 지상을 향해 나팔을 불면 천사의 나팔꽃이라고 하더라며 이 중 악마의 나팔꽃으로 (학폭 피해자를 구원하지 않은) 하늘에 항의하는 뜻으로 썼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제공

장도리를 들고 조직폭력배들을 줄줄이 쓰러뜨린 뒤 생니를 뽑는 무지막지한 응징(영화 '올드보이')도, 자신을 죽이려 한 이들을 찾아가 사무라이처럼 칼로 줄줄이 베어버리는 피범벅(영화 '킬빌' 시리즈)도 없다.


넷플릭스 새 시리즈 '더 글로리' 시즌1에서 고교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인 동은(송혜교)이 가해자들을 턱 밑까지 쫓는 복수의 과정에 물리적 앙갚음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격렬한 액션 없이 복수의 처절함이 영상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지난달 30일 공개된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는 K콘텐츠 시장에서 내수용으로 여겨졌다. 수위 높은 자극으로 범벅된 '장르물 천국'인 해외에서 총은커녕 주인공이 손에 칼도 쥐지 않는 복수극이 통할 거라 기대한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꺾고 '더 글로리'가 해외에서 되레 순항 중이다. 세계 OTT 소비량을 집계하는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더 글로리'는 3일 기준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태국, 카타르 등 9개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미국, 캐나다와 브라질을 비롯해 독일, 벨기에, 프랑스 등 북남미와 유럽 등에서도 줄줄이 톱10에 올랐다. '글리치'와 '종이의 집' 시즌2, '썸바디' 등 최근 석 달 새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시리즈들이 줄줄이 흥행 부진을 겪어 다소 찬바람이 분 K콘텐츠 해외 시장에서 '더 글로리'가 다시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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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동은(왼쪽, 송혜교)과 가정폭력 피해자인 현남(염혜란)은 서로의 복수를 돕는다. 넷플릭스 제공

당한 만큼 직접적 폭력으로 되갚지 않아 시각적 통쾌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이는 '더 글로리'에 해외 시청자들이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폭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그 상처의 지속성에 대한 드라마적 성찰이 새롭고도 묵직하게 받아들여져 입소문을 타는 분위기다. "미국은 학폭에 너무 무감각해졌다. 학폭 가해자를 오히려 만화 캐릭터처럼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무시했는데 '더 글로리'는 잔인함에 대한 기대를 산산이 부수면서 학폭으로 인한 비참함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대부분의 복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가해자를 안타깝게 여기게 하지만 이 드라마는 동은의 상처를 이해하기 쉽고 현실적으로 그려 그녀가 어떤 복수를 하든 시청자를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유명 콘텐츠 리뷰 사이트 IMDB에 올라온 해외 평론가들의 '더 글로리'에 대한 평이다.


허름한 여인숙에서 '달방' 생활하는 가난한 여고생 동은의 학폭에 대한 절규를 세상은 듣지 않는다. 학교뿐 아니라 경찰은 경제·사회적 권력을 쥔 부모를 둔 가해 학생들의 편이다. '국가'와 '어른'들에 외면당한 동은은 결국 사적 복수를 택한다. 그는 교사가 돼 가해자의 아이 담임으로 교단에 선다. 아이에게 직접 해코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 앞에서 추악한 실체를 하나둘씩 폭로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가해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게 동은이 택한 복수의 방식 중 하나다. 이런 동은의 복수를 돕는 건 가정폭력 피해자인 현남(염혜란)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양극화 등 계급 문제로 보여주고 약자들의 연대를 통해 '같이 싸워 이겨내자' 식으로 그려 해외에서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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