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깨고 나오는 청춘, 그들은 왜…
민원 갑질, 단순업무, 적은 월급… 2030 공무원 35% "이직 의향"
임용 후 3년 이내 퇴직한 서울시 공무원 5년째 4배 늘어
바늘구멍 뚫고 합격 기쁨도 잠시 ‘고생 끝에 낙이 없다’ 실망감
“다양성 존중 배경서 자란 세대, 경직된 조직문화에 벽 느껴”
“퇴사합니다.” 대한민국 취업준비생 20만명이 도전하는 공무원 시험. 어렵사리 합격증을 거머 쥔 공무원 가운데 임용 3년 이내 떠나는 퇴사자 수가 해마다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한호 기자. |
2.44%(2018년 국가직 9급 공채 합격률).
바늘구멍과 다름없는 합격률을 뚫고 공무원증을 목에 건 청년들이 퇴사를 꿈꾼다. 20만명이 넘는 공무원시험 응시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직장’에 입사한 기쁨도 잠시, ‘고생 끝에 낙이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지난해 국가직 9급 공채 필기시험 출원 인원은 20만2,978명. 경쟁률은 41대 1에 달한다. 이토록 어렵사리 거머쥔 공무원증을 내려놓고 다른 길을 찾는 퇴사준비생(퇴준생)의 은밀한 일탈 계획은 현실과의 괴리만큼이나 역설적이다.
서점가와 온라인에 불어난 ‘퇴사’ 콘텐츠는 사기업 신입사원뿐 아니라 공공기관에 갓 들어간 이들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퇴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직서에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스노우폭스북스 발행)’나 ‘희망퇴사(b.read 발행)’ 등에는 퇴사를 고민하는 이들이 생각해볼 대목들이 들어있다. 이왕 퇴사할거라면 현명하게 준비하자며 찾는 ‘퇴사학교’나 퇴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 ‘월간퇴사’, 팟캐스트 ‘내-일은 가볍게’도 최근 5년 새 불어 닥친 젊은 층의 퇴사열풍을 잘 보여 준다.
그저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니다. 입사 후 3년 이내 퇴사한 서울시 공무원들이 수백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일보가 서울시 25개 구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입수한 ‘2013~2017년 일반행정직군 공무원 퇴사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임용 3년 이내 퇴사한 서울시 공무원은 모두 432명에 달했다.
2019년 2월 현재 서울시 25개구 구청이나 동 주민센터에 근무 중인 일반행정직군 공무원이 2만7,054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1.59%에 해당하는 수치다. 전체 인원에 비하면 미미한 비율이지만 젊은 퇴사자 수가 해마다 눈에 띄게 상승하는 사실은 간과하기 힘들다. 임용 3년 내 퇴사자는 2013년 32명에서 2014년 54명, 2015년 81명, 2016년 138명, 2017년 127명으로 5년 새 4배나 증가했다.
서점가와 온라인에 불어난 ‘퇴사’ 콘텐츠는 사기업 신입사원뿐 아니라 공공기관에 갓 들어간 이들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스노우폭스북스ㆍ롤링다이스ㆍ엘리ㆍ위즈덤하우스ㆍ알에이치코리아ㆍ팟빵홈 제공. 그래픽=김경진 기자. |
전문가들은 공무원의 장점으로 꼽히는 안정성과 복지 등을 상쇄할 만한 여러 이유가 청년 공무원들을 퇴사로 이끈다고 내다본다. 조경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직사회는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상하관계가 엄격하다”라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배경에서 자란 젊은 세대는 변하지 않은 문화와 가치관에 벽을 느끼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퇴사자와 퇴준생이 말하는 진짜 퇴사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려고’ 유형과 ‘이러다간’ 유형, ‘이럴 줄은’ 유형으로 나뉜다.
‘이러려고’ 유형
공무원이 되면 샐러리맨보다 보람 있고 인간관계 피로는 사기업보다 덜 할 것이라 믿었다. 작은 일을 하더라도 회사의 이윤창출 대신 공직을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동료들과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진영(32ㆍ가명)씨는 여러 공공기관 공고를 빠짐없이 체크하고 시험에 응시하며 수년간 그렇게 믿었다. 그가 수도권 소재 한 공공기관에서 마주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조직문화는 그야말로 ‘후진적’이었다고 유씨는 말한다.
직원 여럿이 지방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 유씨는 상사가 건넨 아침인사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상사는 나란히 들어온 남자직원과 유씨를 향해 “같이 자고 왔냐”며 안부를 물었다. 너무 놀라 “네?”하고 큰 소리로 반응하고 말았다. “원래 아슬아슬한 발언을 자주 하는 분이에요. 처음에는 많이 당황해서 문제제기를 해야 하나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상사에게) 아예 ‘성희롱’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는 걸 알고 나니 그러려니 해요. 남자들이 다수인 조직이라 서로 ‘보고 싶었다’는 식의 대화를 자주 하는데 저에게도 똑같이 대하신 거죠.” 그렇다고 유씨가 시대착오적 성희롱성 발언이나 업무분담과 무관한 지시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당장 그만둘 수 없으니 대안을 찾는 동안 퇴사를 잠시 유예한 것뿐이다. “이러려고 입사한 건 아닌데 계속 다닐 순 없죠.” 부당한 대우와 여성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 분위기는 공공기관 직원들에게 회의감을 주며 또 다른 퇴사자를 만들고 있다.
임용 3년 내 퇴사자는 2013년 32명에서 2014년 54명, 2015년 81명, 2016년 138명, 2017년 127명으로 5년 새 4배나 증가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
‘이러다간’ 유형
불법주정차 단속 업무를 하는 9급 행정직 공무원 최지현(가명)씨는 스스로 민원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고소하겠다’는 협박은 익숙할 정도다. “내 뒤의 차량에는 벌금을 부과하지 않고 나에게만 벌금을 부과한 이유가 무엇이냐”며 고성과 욕설을 내뱉으면서 따지는 민원인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주한다.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거나 “인근 동굴 입구를 막아달라”는 기상천외한 민원을 접수할 때는 어떻게 대응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 ‘민원 갑질’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낮은 연봉을 감수하고 공무원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사기업에 비해 업무강도가 낮은 점에 큰 비중을 둔다. 정시퇴근이 가능하다면 퇴근 후 ‘내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입 공무원들은 “휴일근무와 이어지는 야근 탓에 낮은 급여를 감수한 이유를 도통 못 찾겠다”고 토로한다.
최씨처럼 생활밀착형 업무를 맡는 사회복지직군이나 일반행정직군 종사자들은 때때로 자연재해 대비ㆍ복구작업에 동원되기도 한다. 박철호(가명)씨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느라 휴일 없이 지내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폭우나 태풍, 산불에 대비한 비상근무를 하고 늦은 밤거리 눈을 치우다 보면 월평균 초과 근무시간은 70시간에 육박한다. ‘이러다간 곧 심리상담을 받겠다’거나 ‘어딘가 병이 나고 말겠다’는 우려가 출근길을 막아서면 그동안의 근무 일수를 세어본다. 이들이 더 이상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 퇴사를 준비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공기관에 10년 이상 근무하며 조직문화에 익숙한 현직들의 증언도 이러한 분위기를 뒷받침한다. 국토교통부 소속 13년차 공무원 이성재(41ㆍ가명)씨는 “예상치 못한 조직 문화에 적응을 못 하거나 새로운 적성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면서 “일부 합격자는 공무원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입사했다가 괴리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신입 공무원 중 일부는 퇴사를 택하는 대신 비교적 업무량이 적은 지방청 이동을 희망하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예 조기퇴사해 다른 길을 모색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공무원의 장점으로 꼽히는 안정성과 복지 등을 상쇄할 만한 여러 이유가 청년 공무원들을 퇴사로 이끈다고 내다본다. 조기퇴사자들은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이러다간 곧 심리상담을 받겠다’며 사직서를 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
‘이럴 줄은’ 유형
공무원 진출자가 늘어나니 막연히 ‘좋은 직장’이라 믿고 공무원 시험에 하향지원해 뛰어들었다가 흥미 없고 보상 적은 현실에 이탈하는 고(高) 스펙 청년도 적지 않다. 단순 업무를 반복하는 사이 ‘살아있다는 기쁨’을 잃고 흥미를 찾는 유형이다. 한 공단에서 인턴생활을 마치고 같은 공단에 취직한 이수현(26ㆍ가명)씨는 “민원처리 업무는 콜센터나 다름없고 전반적인 일은 아르바이트생이 해낼 만한 단순업무의 반복이다”라며 “이런 일을 하려고 4년제 대학을 나왔나 라는 회의감이 든다”고 말한다.
우수 인재들이 불확실한 취업시장에서 공무원시험 열풍에 휩쓸리다 예상치 못한 현실을 뒤늦게 마주하기도 한다. 박봉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초과 근무 없이 일한 뒤 140만원을 손에 쥔 신입 공무원은 “정말 이게 다예요?” 라고 소리 내 묻는다. 2019년 1월 개정된 공무원 보수규정에 따르면 일반직 공무원 9급 봉급은 159만2,400원(1호봉). 급여수준을 알았더라도 그 월급으로 영위하는 생활이 어떨지 상상하지 못한 이들도 허다하다.
정소윤 한국행정연구원 공직생활실태조사 연구책임자는 “사기업 정도의 처우는 될 것이라 기대하고 시험을 봤는데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가 큰 것으로 보인다”며 “조직을 바꿀 수는 없으니 비효율이 지속되면 결국 사람이 떠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만명이 넘는 공무원시험 응시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직장’에 입사한 기쁨도 잠시, 청년 공무원들은 ‘고생 끝에 낙이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래픽=김경진기자 |
퇴사 열풍은 연령이나 직급에 따라 편차가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발표한 ‘2017년 공직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젊을수록 이직의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직원 1,500명(중앙정부 500명, 지방자치단체 500명, 공공기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기회가 된다면 이직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직의향이 있다(‘그렇다’ 또는 ‘매우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20대 35.7%, 30대 35.0%, 40대 26.3%, 50대 이상 20.4%로 나타났다.
직급에 따른 차이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직의향을 밝힌 응답자(‘그렇다’ 또는 ‘매우 그렇다’)는 8~9급이 30.8%, 6~7급 29.3%, 5급 25.4%. 1~4급 21.2%로 직급이 낮을수록 퇴사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무원 직렬에 따라 조기 퇴사자가 거의 없이 대다수가 안착하는 기관도 많다. 국토교통부나 법원ㆍ검찰, 법무부 교정직 등은 조기퇴사자가 적은 편이다. 업무특성이 뚜렷한 직렬 입사자들은 비교적 시행착오가 적은 것으로 분석된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김가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