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구수한 '소똥령 숲길' 에 숨을까, 상큼한 '보랏빛 향기'에 빠질까
<66>고성 간성읍 금강산 가는 46번 국도...진부령에서 간성까지
한적함이 지나쳐 다소 쓸쓸해진 길이 있다. 강원 인제군 북면에서 고성군 간성읍으로 넘어가는 46번 국도 진부령은 한때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금강산 관광이 12년째 중단되면서 오가는 차량이 줄고, 이들을 겨냥한 식당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2006년 진부령 바로 아래에 왕복 4차선 미시령터널이 뚫리고, 2017년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진부령을 왕래하는 차량은 더욱 줄었다. 최근 험악한 분위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를 고려하면 진부령에 드리운 분단의 그늘이 쉽게 걷히리라 기대하기도 어렵게 됐다.
분단의 땅 고성, 진부령에 드리운 그늘
강원 고성은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군이자, 분단의 축소판이다. 광복 직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고성군은 전 지역이 북한에 속했다가 한국전쟁으로 일부를 수복해 대한민국 고성군이 됐고 군청은 간성읍에 있다. 미수복 지역은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진부령 고갯마루에 전망대가 있다. 명칭은 전망대지만 실제는 이곳이 6ㆍ25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소공원이다. 향로봉 지구 전투전적비에는 ‘맹호 수도사단 용사들은 단기 4284년 5월 7일부터 동년 6월 9일까지’ 89회에 달하는 ‘괴뢰 제5군단’의 반격을 격퇴하고 설악산과 향로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단기 4284년은 1951년이다.
진부령 전망대에 향로봉 지구 전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
진부령 도로변에 백두대간 표석과 '진부령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진부령은 남한에서 실질적으로 백두대간 종주가 시작되는 곳이다. |
진부령에서 흘리마을 가는 언덕에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이 있다. 백두대간 전 구간을 걸은 산악회와 단체가 기념비를 설치해 놓았다. |
도로변에 세운 ‘백두대간 진부령’ 대형 표석도 따지고 보면 분단의 상징물이다. 진부령은 사실상 남한에서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진부령에서 흘리마을로 오르는 언덕에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부터 지리산까지 690km 남한 땅 백두대간을 종주한 산악회와 단체가 세운 비석이 빼곡하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남들이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뿌듯한 걷기 여행자의 자부심이다.
주유소까지 문을 닫아 다소 을씨년스러운 고갯마루에서 그나마 번듯한 건물이 진부령미술관이다. 군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의 6월 전시 주제 역시 ‘한국동란, 6ㆍ25 기록사진전’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보유한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국토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피폐하게 만든 전쟁의 상흔을 기록한 흑백사진이 두 줄로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모든 게 지나간 옛일이면 좋겠지만,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남북이 반목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으니 6월의 진부령은 여전히 무겁다. 미술관에는 이중섭 드로잉 작품과 고려불화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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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 정상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고갯마루를 넘으면 흘리마을이다. ‘고성팔경 마산봉 설경’ ‘전국 제일 피망마을’ 2개의 표지판이 마을의 이력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흘리마을은 2006년까지 스키장이 영업하던 곳으로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던 마을이다. 그러나 도로 주변에서 성업하던 장비 대여업소는 이제 문이 닫힌 채 속절없이 낡아가고, 인적 없는 리조트 건물 입구엔 외부인의 접근을 경계하듯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이따금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반객이 마산봉(1,052m)에 오르기 위해 지나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행히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마을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피망 생산지로 변신했다. 원색 계열 리조트 건물의 페인트는 빛이 바래 가지만 마을에는 비닐하우스가 차례로 들어섰고, 그 안에 빛깔 고운 고랭지 피망이 자라고 있다.
마산봉 아래 진부령 흘리마을. 뒤편 스키장이 영업을 중단한 후 건물은 퇴색되고 마을은 다소 쓸쓸해졌다. |
진부령(529m)은 오랜 옛날 추가령ㆍ대관령과 함께 강원 영동과 영서를 잇는 3대 고갯길이었다. 보부상이 넘던 오솔길을 1631년 간성현감 이식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30년에는 차량이 넘을 수 있는 비포장 도로로 보수했고, 불과 33년 전인 1987년 왕복 2차선 도로로 확장 포장됐다. 평창에 진부면이 있어 헷갈리기 쉬운데 이곳이 왜 ‘진부’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평창 진부면에서 강릉 주문진을 잇는 고갯마루는 진고개다.)
이식은 ‘진부령유별시’에서 ‘하늘에 높이 솟은 영마루, 새도 넘기 힘든 길’이라 적었지만 사실 동서를 잇는 다른 고갯길에 비하면 진부령은 순한 편이다. 간성 읍내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급회전 구간이 있지만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다. 계곡 주변에는 진부리와 장신리 두 개 산골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캠핑장을 갖춘 유원지다. 계곡은 넓지 않아도 진부령 골짜기를 흘러내린 물이 맑고 청량하다.
진부령 중턱의 소똥령마을은 고개를 넘자면 꼭 쉬어가거나 하룻밤을 묵어야 했던 곳이다. 계곡을 따라 길쭉하게 마을이 형성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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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리 마을은 행정 지명보다 ‘소똥령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계곡 주변으로 밭이 길쭉하게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의 ‘장신리’를 놔두고, 투박하고 직설적인 이름을 쓰는 이유는 마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 간성에서 인제군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가려면 장신리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주막마다 쇠똥이 수북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진부령으로 가는 오솔길에도 쇠똥이 말라붙기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소똥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관광지로 알리기에도 직관적이고 구수한(?) 소똥령이 유리해 주민들도 이 명칭을 즐겨 쓴다.
유래를 정당화하자면 이런저런 구실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고개를 넘는 발길에 닳고 닳아 산 모양이 쇠똥 무더기같이 둥그스름해졌다거나, 오솔길을 걷다 보면 쇠똥처럼 보이는 무덤 자리도 꽤 발견된다고 주민들은 덧붙인다.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때 희생된 이들의 무덤일 거라는 논리로 이어지는데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추정이다.
소똥령 숲길 초입의 구름다리. '소똥령 숲길 입구'라 적힌 표지판 부근에 차를 세우고 조금만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
소똥령 숲길은 옛날 소똥령마을에서 진부령으로 오르던 오솔길이다. 구름다리에서 소똥령마을까지는 약 3.5km다. |
보부상과 장꾼들이 넘던 옛 오솔길은 근래에 ‘소똥령 숲길’로 정비돼 알음알음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계곡이 좁고 경사가 급해 길은 물길처럼 순탄하지 않다. 소똥령마을에서 진부리까지 약 3.5km를 거슬러 오르자면 2시간가량 걸린다. 반대로 위에서 내려오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대부분 이 방법을 택한다. 진부령에서 간성 방면으로 약 7km를 내려오면 도로 오른편에 ‘소똥령 숲길’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따로 주차장이 없지만 급커브 바깥 모퉁이여서 차를 여러 대 주차할 만큼 공간이 넓다. 소똥령 숲길을 완주하는 이들은 대부분 단체 버스나 차량 두 대를 이용한다. 1대는 소똥령마을에 두고, 일행이 다른 차로 숲길 입구까지 가는 식이다.
표지판 외에 어떤 편의시설도 없어 제대로 찾은 걸까 의아한데, 한 발만 들이면 바로 깊은 숲속이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섞여 어둑한 길을 조금 걸으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소똥령 구름다리’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상하좌우로 제법 흔들림이 큰 출렁다리다. 다리가 계곡 건너 숲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 완전히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맛보기로 이 구간만 걸어도 숲길 산책으로 더할 나위 없다.
숲길 아래쪽 소똥령마을에서는 ‘유아숲 체험장’에서 칡소폭포까지 약 560m 구간을 왕복하는 코스가 무난하다. 한 차례 작은 언덕을 넘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칡소폭포는 높이 3m로 크지 않은 폭포지만, 거친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웅장하다. 그 옛날 칡넝쿨로 그물을 짜서 바위에 걸쳐 놓으면 송어나 연어 등의 물고기가 걸려들었다는 폭포다.
진부령 소똥령마을의 유아숲 체험장. 고성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소똥령 숲길의 칡소폭포. 유아숲 체험장에서 계곡을 거슬러 560m 지점에 있다. 규모는 작아도 물소리가 웅장하다. |
소똥령 유아숲 체험장은 고성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쭉쭉 뻗은 솔숲 아래에 그네와 목재 징검다리 등 자연친화적 놀이시설을 설치해 놓았다. 나무와 친구되기, 숲 놀이, 동화책 읽기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주말을 제외한 월~금요일만 운영한다.
천년고찰 옆에 보랏빛 향기, 하늬라벤더팜
6월 고성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곳은 라벤더 농장이다. 소똥령마을에서 간성읍으로 약 11km를 내려오면 얕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농장의 정식 명식은 ‘하늬라벤더팜’. 프랑스 남부지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반해 하덕호 대표가 15년 전부터 가꿔온 라벤더 농장으로 7월 초까지 보랏빛 향기를 내뿜는다. 지난 주말 절정이었으니 이번 주까지는 그 황홀함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라벤더는 건조한 기후를 좋아한다. 하 대표는 “올해 고성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꽃이 유난히 곱지만, 코로나19로 방문객이 많이 줄었다”며 아쉬워했다.
하늬라벤더팜은 6월 고성의 '인생사진' 성지다. 장맛비가 내리고 나면 꽃은 점차 시들겠지만 7월 초까지는 보랏빛 들판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
입구의 장미정원을 지나 카페와 선물가게 사이 통로를 지나면 약 1만㎡ 보랏빛 들판이 동화처럼 펼쳐진다. 붉은 기와와 파스텔 색조의 건물, 메타세쿼이아 숲이 들판 끝에 배경으로 걸린다. 목가적인 유럽의 농촌마을 풍경이다. 사람이 적은 곳에서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내리고 잠시 숨을 들이마신다. 상큼한 라벤더 향이 가슴속까지 가득 번진다.
장맛비가 내리고 나면 라벤더 꽃은 점차 시들겠지만 향기는 오일과 비누 등에 진하게 남는다. ‘인생사진’을 건지기 위해 찾아 온 방문객의 손에도 라벤더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 있다. 절정의 6월을 보낸 라벤더 농장은 또 다른 경관 작물로 색다른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라벤더 농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1,500년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건봉사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대건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당당히 ‘금강산 건봉사’라는 현판을 내건 대한민국 최북단 사찰이다.
난리통에도 유일하게 형체를 보존한 불이문(不二門), 아치형 석재 교량인 능파교와 홍교,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 사리를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가장 눈길을 잡는 건 입구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여러 개의 돌확이다. 설명이 없어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전란으로 소실되기 전 건봉사 사진을 보면 사찰에 이렇게 많은 돌절구가 필요한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건봉사는 무언가를 꼭 봐야 할 절간이라기보다 입구 솔숲에서부터 산사의 여유를 누리기 좋은 곳이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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