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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포도에서 발견한 뜻밖의 달콤함... 로마인도 아이스와인을 즐겼을까

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한국일보

아이스와인용 언 포도. 영하 7~8도에서 수확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독일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이스와인(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Eiswein·아이스바인)용 포도 수확하기. 주변에 이 얘기를 했더니 “가능하겠어?”라며 다들 시큰둥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작년 이맘때였다. 포도를 수확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독일로 날아갔다. 결국 포도밭의 단꿈을 이루진 못했다. 여행하는 동안 기온이 단 하루도 아이스와인용 포도 수확에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여행 가방 속에 아쉬움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아이스와인 생각을 까마득히 잊었을 무렵이었다. 독일 13개 생산지 어느 곳에서도 2019년산 아이스와인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지구 온난화의 직격탄을 맞았단다. 필자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스와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 상태에서 언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보니, 따뜻해진 겨울 날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생각이 도드라져 아이스와인에 관한 기록을 눈을 부릅뜨고 뒤지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먼저, 고대 로마 시대에 이미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는 주장. 로마군의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가 37권으로 엮은 ‘세상 모든 이야기들(Naturalis Historiae)’에 기록을 남겼다.


“달콤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포도를 수확하지 말라.” 동시대의 시인 마르티알리스 역시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 정도 기록으로 당시에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렇게 만든 와인을 먹어봤으니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물며 고대 로마인이 누구이던가. 우리 선조가 한반도에 삼국시대를 열 즈음, 한여름에 알프스의 얼음으로 와인을 시원하게 칠링해 마셨고 머나먼 브리타니아(오늘날 영국의 그레이트브리튼섬)에서 나는 굴을 싱싱하게 운반해 미식의 향연까지 즐겼으니, 그들이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아이스와인 강국 독일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794년 어느 늦가을이었다. 프랑켄 지역 농가들은 포도밭을 돌보며 수확 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잘 영근 포도밭에 때 이른 한파가 닥치고 말았다. 서리가 내려앉자 포도는 모두 얼어버렸다. 포도밭 앞에서 얼음처럼 굳은 농부들은 언 포도라도 수확할 수밖에 없었다. 시린 손을 불끈 쥐고는 땡땡 언 포도에서 즙을 짜내 와인을 만들었다. 농부들의 갖은 고생 덕분인지 와인은 맛이 꿀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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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한 농부가 해가 진 겨울 밤에 아이스와인용 언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독일 라인헤센 지역에는 상세하게 기록된 문서가 남아있다. 1829년 라인헤센의 드로머샤임 마을에도 포도를 수확하기 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농부들은 올해 농사는 망쳤다고 여기고 포도를 가축 사료로나 쓰려고 나무에 달린 채로 그대로 방치했다. 기온이 더 떨어지자 포도는 마치 황태덕장의 황태처럼 얼고 녹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포도의 당분이 농축됐다. 이 사실을 알아챈 농부들이 언 포도 그대로 수확해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망쳤다고 여긴 농사를 뜻밖의 달콤함으로 결실 맺은 농부들은 얼마나 안도했을까.


최초의 아이스와인을 고대 로마인이 만들었는지 독일인이 만들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계절의 굴곡과 시간의 손길이 만난, 삶의 어느 굽이에서 ‘문득’ 탄생했으리라.


한편, 아이스와인을 상업적으로 처음 생산한 와이너리는 따로 있었다. 라인헤센의 이야기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1858년이었다. 라인가우 지역에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라는 와이너리가 있었다. 이 와이너리는 이미 늦수확 포도로 당도 높은 스위트 와인을 만든 경험이 있었기에 아이스와인을 본격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지 그리 활발하게 생산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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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대표 아이스와인인 이니스킬린. 언 포도로 만들어여만 아이스와인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니스킬린 SNS 캡처

아이스와인은 기술만 있다고 만들어낼 수 있는 와인이 아니다. 2019년 겨울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처럼 기온이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 생산할 수 없다. 슐로스 요하니스베르크 와이너리에도 기술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여전히 기술이 부족했거니와 여러 정밀 장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언 포도에서 포도즙만 추출할 수 있는 공기압을 이용한 착즙기나 밤이나 새벽에 수확할 수 있도록 작업 환경을 밝혀주는 이동식 발전기와 조명 장치, 언 상태로 포도를 수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원격 온도 경보장치, 야생동물이나 새로부터 포도나무와 포도를 보호해줄 비닐캡이나 그물망 등이 없었으니, 지금처럼 아이스와인을 활발하게 생산할 수 없었을 게다.


1960년까지 100여 년 동안 독일에서 아이스와인이 단지 6개 빈티지만 생산된 데에는 이처럼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그때는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한 벌레 필록세라가 창궐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두 차례 세계대전도 있었으니, 포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을까 싶다.


숱한 시련이 아물고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1961년부터 독일은 아이스와인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80~90년대에는 아이스와인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세상사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 탓에 앞으로는 독일에서 아이스와인 생산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전통적인 아이스와인 강국 독일이 아이스와인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아이스와인을 맛보지 못하게 될까? 다행히 아이스와인 생산량 세계 1위인 캐나다가 있다.


캐나다에서 아이스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1972년이다. 독일 이민자인 발터 하인레가 오카나간 밸리에서 아이스와인을 만들면서부터다. 현재 캐나다에서 아이스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나이아가라 지역의 온타리오 호숫가에 위치한 이니스킬린이다.


캐나다 말고도 겨울 날씨가 제법 매서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 중유럽 여러 나라와 몰도바, 중국, 미국, 이탈리아에서도 아이스와인을 생산한다. 최근에는 신대륙 여러 나라에서도 소량 생산하고 있으니, 아이스와인을 맛보지 못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아이스와인은 날씨 조건이 맞아야 생산할 수 있다. 여름에는 포도가 충분히 익을 만큼 일조량이 풍부해야 한다. 가을에는 포도가 곰팡이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며, 겨울에는 포도가 충분히 얼 만큼 추워야 한다. 아이스와인을 생산하는 곳 대부분이 독일이나 캐나다처럼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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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품종을 빚은 아이스와인. 왼쪽부터 카베르네 프랑, 게뷔르츠트라미너, 리슬링, 그뤼너벨트리너, 비달블랑. 사진=와인폴리 홈페이지 캡처

아이스와인 포도 품종은 생산국만큼이나 다양하다. 독일에서는 리슬링, 캐나다에서는 비달블랑을 주로 쓴다. 그 밖에도 게뷔르츠트라미너, 그뤼너 벨트리너, 소비뇽블랑, 슈냉블랑, 샤르도네, 실바너, 세미용 등 화이트 품종과 카베르네프랑, 쉬라즈, 메를로, 피노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산지오베제 등 레드 품종도 있다.


그런데 언 포도로 어떻게 와인을 빚을까. 다른 과일이 그러하듯 포도 역시 수분과 당분 등 여러 성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성분들은 서로 ‘어는 점’이 다르다. 수분은 영하에서 얼지만 당분 등 다른 성분은 여간해서는 영하에서 얼지 않는다. 이러한 ‘결빙점 차이’를 이용해 아이스와인을 만든다. 기온이 영하 7~8도까지 떨어지기를 기다려 수분만 꽁꽁 언 포도를 수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포도 수확은 주로 한밤중이나 미명에 시작해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마친다. 기온이 오르면 포도의 언 수분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수확한 포도를 재빨리 옮겨 압착하면 언 수분은 결정 상태로 제거되고, 당분 등 여러 성분이 농축된 포도즙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추출한 즙엔 당분은 물론이고 산도, 아로마, 미네랄 등이 농축돼 있다. 이 즙을 발효해 와인을 만들면 높은 당도와 산도가 균형을 이룬 와인이 빚어진다.


아이스와인은 잘 익은 포도를 자연적으로 얼려서 빚기 때문에 맛과 향이 다른 스위트 와인보다 맑고 깨끗하고 상큼하고 건강한 느낌, 프레시하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아이스와인은 포도를 수확하기까지 여러 위험 요소를 극복해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익을 때까지 병충해나 곰팡이 피해를 보지 않아야 하고 기온도 떨어져야 하니, 농부들의 수고로움에 ‘천우신조’의 도움까지 필요한 셈이다. 게다가 당도가 높다 보니 들짐승과 날짐승이 가만두질 않는다. 이 모든 조건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 해의 땀과 정성을 포기해야 한다.


비싼 데에는 만만찮은 인건비도 한몫한다. 포도를 언 채로 수확해야 하니,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포도를 따야 한다. 무사히 수확했더라도 수분을 제거한 즙으로만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다른 와인에 비해 생산량마저 적다. 보통 와인 병은 용량이 750ml인데 아이스와인이 500ml나 375ml 용량의 병에 담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높은 당도 때문에 발효 기간 또한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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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국가인 몰도바에서 생산하는 아이스와인. 왼쪽부터 라다치니 리슬링 아이스와인, 아스코니 무스캇·카베르네소비뇽·리슬링 아이스와인. 사진=아베크와인, 금양인터내셔날 홈페이지 캡처

그런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아이스와인용 포도를 ‘자연 상태’에서 얼려야 할까. 요즘엔 냉동 기술을 이용한 ‘냉동추출법’이란 방식으로 아이스와인을 대량 생산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면 가격이 저렴할뿐더러 맛도 상당히 좋아 부담 없이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단, 우리가 횟집에서 익히 경험했듯, 와인도 ‘자연산’과 ‘양식’이 같을 수는 없다. 자연이 얼린 포도로 만든 와인만 아이스와인이라 칭하는 이유이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에서는 이 규정을 엄격히 적용한다.


그러고 보면, 아이스와인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굉장히 달콤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로 지구의 빙하들이 녹고 있다. 기후 이상 탓에 포도가 자연적으로 얼지 않더라도 기술의 힘으로 얼린 ‘아이스드’ 와인을 맛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어쩌면 우리가 먹는 아이스와인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빙하의 영혼이 아닐까.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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