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떡, 요구르트 단맛 확 이끌어내는 ‘메이플 시럽’
이용재의 세심한 맛
팬케이크에는 메이플 시럽이다. 비빔밥에 고추장이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팬케이크도 메이플 시럽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팬케이크를 구워 먹곤 했다. 부모님이 외국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던 걸까(자식들은 따라가지 못해 한국에 남아 조부댁에 맡겨졌다), 아직도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늘 약간의 서양식 식습관이 양념처럼 일주일 스물 한 끼의 식사에 한두 번 정도 신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미 국산 믹스는 식품점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일요일 아침의 팬케이크가 외국 생활과 전혀 상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동안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억을 좀 더 열심히 더듬어 보면 핵심은 팬케이크가 아닌 시럽이었던 것 같다. 그저 단맛이 좋았기에 가루를 물에 타서 만든, 사실은 걸쭉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갈색의 액체를 마냥 좋다고 간장을 만두에 찍어 먹듯 찍어 먹었다. 누군가는 사실 도넛 믹스로 만든 팬케이크가 훨씬 더 맛이 있노라고 자기집의 비법을 슬며시 알려주기도 했지만, 시럽 때문에라도 팬케이크 믹스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물론 한참 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럽의 참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팬케이크에는 메이플 시럽이다. 비빔밥에 고추장이 빠지면 음식이 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 듯 팬케이크도 메이플 시럽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1ℓ들이를 1만5,000원 수준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메이플 시럽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넷플릭스의 음식 다큐멘터리 ‘검은 돈 (Rotten)’을 권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사위, 폭스바겐 등이 사이 좋게 한 회씩 꿰차고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벌이는 온갖 비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물 혹은 부자가 등장해 사기도 치고 등도 쳐먹는 이야기를 주로 다큐멘터리이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나름 소박한 메이플 시럽에 대한 것이었다. ‘메이플 시럽은 누가 훔쳤을까?’는 캐나다 퀘백주에서 벌어진 절도 사건의 사연을 소개한다. 물론 절도의 대상은 메이플 시럽이다. ‘아니 뭐 메이플 시럽마저도 훔치는 세상인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도 규모가 1,000만 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메이플 시럽의 가격은 조합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된다. 게티이미지뱅크 |
수액 40ℓ에서 시럽은 1ℓ에 불과
퀘벡주에서는 조합이 메이플 시럽의 가격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나의 숲(혹은 농장)에서 나온 메이플 시럽이라고 해서 임의로 가격을 붙여 팔 수가 없다. 그래서 조합은 ‘메이플 시럽계의 석유수출국기구(OPEC)’라 불리고, 실제로도 출하량을 통해 가격을 엄격히 관리한다. 생산량이 많은 해에는 잉여분을 드럼통에 포장해 창고에 비축했다가 적은 해에 방출해 원하는 수준으로 유지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생산자가 조합의 존재 및 엄격한 가격 관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장경제체제라면 내 재화의 가격을 시장이 결정해 더 낮은 가격에도 팔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조합이 방해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조합 반대파는 시위 같은 의사 표현의 단계를 넘어서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메이플 시럽을 퀘벡주 외부로 몰래 파는 생산자와 브로커, 포장 및 수출 업체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일부 브로커와 포장 업체가 짜고 물을 채운 드럼통으로 바꿔치기 하는 수법을 통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결국 적발되어 공모자들이 최대 8년의 징역과 1,000만 달러에 이르는 벌금을 선고 받은 가운데, 다큐멘터리는 이런 수준의 가격 관리 및 통제가 과연 정당한지 화두를 던진다.
달콤하고 걸쭉해 메이플 시럽을 꿀과 비교할 수도 있다. 일정 수준 서로 대체해 쓸 수도 있는 감미료이지만 둘은 사뭇 다르다.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꿀은 동물성이고 메이플 시럽은 식물성이지만 차이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꿀은 벌이 목숨을 바쳐 일해서 걸쭉한 상태로 만들어 놓지만 메이플 시럽은 사람이 열심히 완성시켜야 한다. 처음 나무에서 추출했을 때에는 묽은 수액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단풍나무나 찌른다고 해서 미래의 시럽인 수액이 흘러 나오는 것은 아니다. 퀘백주 외에도 미국의 버몬트주를 비롯한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 서식하는 설탕 단풍나무(Acer Saccharum)를 비롯한 세 가지 품종의 만이 메이플 시럽이 될 수 있다.
메이플 시럽의 제철은 2~4월이다. 나무에 구멍을 뚫고 배출구와 관을 통해 24시간 수액을 추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또한 사시사철 메이플 시럽을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이플 시럽의 제철은 한겨울에서 초봄 또는 2~4월의 3개월이다. 마냥 춥다고 장땡인 것도 아니라 밤은 매우 춥되 따스한 시기가 뒤를 이어야 한다. 그래야 온도 변화를 통해 나무 내부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원료인 수액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런 시기에 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배출구와 관을 꼽아 모은 수액을 24시간 이내에 끓여 졸이기 시작한다. 당분 함유량이 2~3% 수준으로 낮으므로 그보다 오래 보관하면 수액이 변질하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수분의 증발이 빠르게 일어나도록 수액을 최대한 넓은 팬에 담아 센 불로 시럽의 당 함유량이 66%(100g당 당이 66g)에 이를 때까지 졸인다.
이 기준에 맞을 때까지 졸이고 나면 결국 40대 1 의 비율, 즉 40ℓ의 수액을 가지고 단 1ℓ의 메이플 시럽을 만들 수 있다. 나무로 환산하자면 한 그루당 1년에 250㎖ 꼴이다. 또한 나무가 적어도 40년은 자라야 수액을 뽑을 수 있고 100년이면 은퇴시켜줘야 한다.
메이플 시럽은 색을 중심으로 여러 기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데, 미국과 캐나다가 다르고 또 주마다도 다르므로 너무 고민하며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많은 생산자의 시럽을 섞어 제품화하므로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구분 자체가 큰 의미를 못 품는다. 따라서 미국산을 기준으로 A등급 가운데 최대한 저렴한 제품을 찾아도 메이플 시럽의 맛을 충분히, 경제적으로 즐길 수 있다.
조직이 스폰지처럼 다공질인 팬케이크는 훨씬 많은 양의 시럽을 흡수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퀘백주 조합의 가격 통제부터 1,000만 달러 어치의 도둑질(과 징역 8년의 대가), 짧은 생산 기간 및 오랜 졸임 속의 기다림 등의 사연을 전부 알고 나면 메이플 시럽이 이전보다 조금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아껴 먹어야 한다고? 전혀 아니고 정반대이다.
팬케이크든 프렌치토스트든 좋아하는 음식에 단맛을 원하는 만큼 푸짐하게 끼얹어 먹은 뒤 접시까지 핥는 게 도리이다. 팬케이크도 프렌치토스트도 결국은 빵이라 조직이 스폰지처럼 다공질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액체를 흡수할 수 있으며, 그럴 때 오히려 음식의 완성도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따라서 아껴 먹기는 메이플 시럽을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다. 가짜인 설탕 시럽을 경계하는 게 정도이다.
메이플 시럽이 결코 비싸지 않건만 팬케이크 믹스 속의 가루처럼 대체품이 기승을 부린다. 찬찬히 속내를 들여다 보면 너무나도 대중적인 음식이므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미국의 현실에서 원가 절감을 위해 만들어낸 흉물이다. 물엿(콘 시럽), 고과당물엿, 물, 셀룰로오스검, 캐러멜 컬러, 소금, 천연 및 인공 조미료, 소듐벤조에이트(방부제)… 국내에서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는, 꽤 유명한 ‘팬케이크 시럽’의 재료 목록이다.
점잖게 복제품이라 부르기엔 메이플 시럽을 흉내 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기에 이런 제품은 그저 가짜이다. 따라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가까이 하지 않고, 접근의 여지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 가게가 이런 제품을 쓴다면 팬케이크든 프렌치토스트든 접시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다시는 재방문 하지 말아야 한다(물론 계산은 꼭 하자).
바삭하게 구운 떡을 꿀 대신 메이플 시럽에 찍어 먹으면 또 다른 맛의 경험을 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떡, 요구르트와도 찰떡궁합
한편 굳이 다공질의 빵류, 혹은 밀가루 음식이 아니더라도 메이플 시럽은 탄수화물의 맛을 두 차원쯤 돋워준다. 그렇다, 빵 또는 밀가루 음식이 아니라면 쌀로 뽑은 떡이 있다. 가래떡을 겉이 바삭하지만 타지는 않도록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굽는다. 그리고 조금 식혔다가 양 손으로 잡아 당기면 바삭한 겉은 갈라지고 말랑해진 속은 쭉 늘어난다. 이를 적당한 선에 끊어 메이플 시럽을 찍어 먹으면 꿀이나 조청처럼 진하게 떡에 착 감기지는 않지만 오래 졸여 끓여낸 특유의 향이 또 다른 맛의 경험을 이끌어 낸다.
이미 충분히 맛있지만 굵은 바닷소금을 몇 알갱이 뿌려주면 입 안에서 바삭하게 터지며 ‘단짠’의 밀고 당기기가 벌어져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경험을 맛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꿀보다 묽은 데다가 맛도 잘 어울려 요구르트 단맛의 주도권을 잡는데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단맛이 아예 없는 요구르트를 사서 메이플 시럽을 입맛대로 섞어 먹자.
요구르트의 단맛을 이끌어내는 데도 메이플 시럽이 요긴하다. 게티이미지뱅크 |
메이플 시럽을 1ℓ에 1만5,000원 수준에서 살 수 있다고 했지만 고급 제품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요즘은 커피나 초콜릿 등 싱글 오리진 열풍에 힘입어 ‘싱글 포레스트’ 메이플 시럽이 등장하고 있다. 한 군데의 산지나 농장에서 생산한 콩만 가공한 커피 원두나 초콜릿처럼, 하나의 숲에서 추출 및 생산한 시럽만 병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다. 원래 지역 혹은 조합 별로 생산한 시럽을 한데 모아 병입 하는 게 표준처럼 자리 잡고 있는데, 일종의 예외로 한정된 지역의 산물만 상품화한다.
대부분의 메이플 시럽 농가가 소규모이기에 이런 생산 및 브랜딩이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관건은 결국 맛이다. 넓게는 하나의 밭에서만 생산하는 와인까지 포함, 싱글 오리진 기호 식품은 ‘테루아’를 장점으로 내세운다. 한정된 규모의 산지만이 품고 있는 토질이며 기후 조건 등의 세부 요인인 테루아가 기호 식품의 개성을 결정짓는다는 게 핵심 논리이다.
그래서 메이플 시럽도 싱글 포레스트 제품이 더 맛있을까?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자료로 판단해보면 그렇지 않다. 일단 테이스터, 즉 맛보기 전문가들이 ‘대세에는 지장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품 또한 절대적으로는 엄청나게 비싸지 않으므로 (일반 메이플 시럽의 2배 안팎),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경험치를 늘린다는 차원에서는 시도할 가치가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