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흰자, 굳지 않은 노른자… 영화 속 ‘우아한 계란’ 만들어 볼까요?
한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식재료, 계란에 대하여
너무 흔해 천대받는 계란
냄비에 물 2.5㎝ 깊이 담아
물이 끓으면 계란 넣고
6분30초 삶으면 완성
삶기ㆍ부침ㆍ수란 등 따라
최적 익힘 구간도 다양
‘요리사의 척도’ 불리기도
흰자의 묽은 가장자리를 구멍 뚫린 국자 등으로 걸러내고 예쁘게 부쳐낸 계란. 서니 사이드 업, 한국 말로는 계란 후라이라고 부른다. 게티이미지뱅크 |
최근에서야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을 보았다. 구아다니노 감독의 예전작 ‘아이 엠 러브 (2009)’만큼의 감흥은 못 느낀 가운데, 첫 아침 식사 장면을 오래 곱씹었다. 도착 후 저녁도 거르고 아침까지 잔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 분)는 자기 몫의 반숙 계란을 대강 깨서 허겁지겁 먹는다. 흰자는 부드럽고 노른자는 익지 않았지만 따뜻한 것을 컵에 받쳐 낸, 우아하다면 우아할 계란이다. 원래 이 장면은 엘리오를 향한 올리버의 욕망을 드러낸다고 알려져 있다. 펄먼 교수와 ‘한 개 더 먹지 그래?’ ‘아닙니다. 저는 스스로를 잘 알아요. 그럼 계속 먹고 싶어질 거에요’ 라고 주고 받는 대화가 실마리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섬세하게 삶은 계란을 우악스럽게 깨부수는 미국인만 들어왔다. 유럽의 맥락에 던져 놓으면 인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리고 거칠게 행동하는 미국인 말이다. ‘킬러들의 도시 (2008)’를 비롯, 많은 영화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데 실제로 그렇다.
계란을 둘러싼 수많은 실패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도 기껏 계란에 대해서나 생각한다. 직업병이다. 섬세한 재료이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마땅하건만 흔하디 흔해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쓰고 또 써왔다. 지난 두 권의 책 (‘한식의 품격’과 ‘냉면의 품격’)에서도 다룬 바 있으니 혹 읽은 이라면 ‘또 계란이냐?’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계란은 천대받는 식재료이다. 삶기(반숙과 완숙), 부침(‘오버 이지’, ’서니 사이드 업’), 수란 등 조리법에 따라 최적으로 익히는 구간도 다양한데 단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2017년에는 피프로닐에 오염된 계란이 유통된 소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식재료 자체에 대한 믿음도 바닥을 쳤다. 그래서 연재 가능성을 타진할 때 가장 먼저 생각했다. 식재료에 대해서 쓴다. 첫 타자는 당연히 계란이다. 쓰지 못한 계란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정확하게는 계란의 실패담이다.
대표적인 실패담을 살펴보자. 공항의 라운지에서 계란 부침을 아침으로 먹었다. 먹기는 먹었지만 계란을 부치는 광경은 서글펐다. 번철에 계란을 까서 올리니 흰자는 줄줄 늘어지고 노른자도 주저 앉는다. 재료부터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이런 계란을 기름도 제대로 두르지도, 적절히 달구지도 않은 표면에서 익히니 자꾸 달라붙기만 한다. 뒤집개로 긁어 어찌어찌 익혀 앞다투어 내미는 접시에 올린다. 너무 익힌 ‘오버 이지’이다. 한편 인스타그램에 최적화 되었다는 국적 불명 음식점에서는 안 익힌 ‘서니 사이드 업’이 사진을 위한 ‘센터’의 역할을 맡는다. 덜 익히다 못해 아예 차가울 정도로 안 익힌, 날 것에 한없이 가까운 노른자가 흐느적거린다. 식품 안전을 의심한다.
냄비의 찬물에 계란을 담고 불에 올린다. 물이 끓으면 불을 끄고 그대로 둔다. 담가 놓은 시간에 따라 계란이 익는 정도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5~7분 사이에서 컵에 받치지 않고 껍데기를 벗겨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익는다. 게티이미지뱅크 |
삶은 계란은 부침보다 더 괴롭다. ‘삶은 달걀’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곰이 등장해 ‘삶은 달걀은 물이랑 같이 먹어야 목이 막히지 않아’라고 조언한다. 맞는 말이지만 애초에 잘 삶았다면 목이 막힐 이유가 없다. 한국의 삶은 계란은 한결같이 뻣뻣하다. 흰자는 질기고 노른자는 부스러지니 목이 멘다. 그나마 삶았다면 어떻게든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목욕탕의 단골 간식인 구운 계란은 정말 먹기가 힘들다. 이렇게 익힌 계란이 평양냉면처럼 이제 만 원 넘게 주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에 왜 굳이 올라야 하느냐고 부지런히 지적해왔지만 금세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기본적인 부침과 삶기가 이 정도이니 서양식 오믈렛이나 일본식 계란말이 같은 요리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영국에서 스타 셰프의 선구자 대접을 받는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는 ‘요리사의 실력을 시험해보려면 계란을 줘 봐라’라고 말한 바 있다. 음식점과 요리사의 수준을 파악하는데 계란 요리를 척도처럼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 한국에서 맥주 광고를 찍은 ‘욕쟁이’ 셰프 고든 램지의 멘토가 하는 말이니 믿어볼 만 하다.
‘요리사의 실력을 보려면 계란을 줘라’
원고를 쓰다 말고 트위터에 질문을 툭 던졌다. 계란을 잘 깨는 방법이라는 게 있을까요? 처음으로 계란을 깼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사실 좀 무서웠다. 생명을 훼손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껍데기도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그러나 계란 없이는 라면도 완성되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껍데기를 몇 번 싱크대 바닥에 두들겼다. 검지손가락을 넣기도 전에 껍데기가 조각조각 깨져버렸고, 계란은 싱크대를 주르르 흘러 그대로 수채구멍까지 미끄러져 들어갔다. 흰자가 하수구로 사라져 버리고 덩그러니 남은 노른자를 라면이 붇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들여다 보았다. 그 노란색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계란을 깔 때는 부엌 싱크대 상판 같은 평평한 바닥에 쳐야 깨끗하고 크게 금이 가서 내용물에 상처를 덜 입힐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위안이라면 제대로 까기는 했다는 점이다. 계란 껍데기는 은근히 단단한데다가 자잘하게 조각이 날 수도 있으니 내용물, 즉 흰자와 노른자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노른자가 터진다거나 껍데기 쪼가리가 계란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접이나 사발의 가장자리에 계란을 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 평평한 바닥, 즉 부엌이라면 싱크대 상판 같은 데 쳐야 깨끗하고 크게 금이 간다. 이때 만일을 대비해 계란을 한 개씩 별도의 종지나 사발에 깨서 확인한 다음 원하는 용기로 옮긴다. 드물기는 하지만 계란이 상했을 경우 음식 전체를 망치는 불상사만큼은 피할 수 있다. 어느 새벽, 배가 고파 끓인 마지막 라면을 상한 계란 때문에 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가?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없다.
껍데기 까는 법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으니 기본 가운데 기본인 계란 조리법 세 가지만 소개하겠다. 자질구레하지만 은근히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조리법이다. 첫 번째는 ‘콜 미 바이 네임’의 아침식사에 등장한 우아한 계란으로, 삶기보다 찜에 가깝다. 물을 냄비에 2.5㎝ 깊이로 담아 끓인다. 계란을 찜기에 담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냄비에 올린 뒤 뚜껑을 덮는다. 찜기가 없다면 국자 등으로 계란을 한 개씩 냄비에 살며시 내려 놓는다. 6분 30초를 삶으면 영화처럼 흰자는 부드럽고, 노른자는 따뜻하지만 굳지 않은 상태로 익는다. 위를 잘라낸 뒤 맬든(Maldon)처럼 아삭하게 씹히는 알갱이의 바닷소금을 조금 뿌리면 간이 맞는 한편 질감의 대조도 맛볼 수 있다. 국산도 흔해진 아스파라거스를 삶거나 데쳐 노른자를 찍어 먹으면 맛있다 (토스트도 몇 쪽 곁들인다). 찐 계란을 받치는 그릇의 정식 명칭은 ‘코크티에(coquetier)’라는 프랑스어이지만 인터넷에서는 ‘에그컵’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찐 계란을 받치는 그릇의 정식 명칭은 코크티에. 인터넷에서는 에그컵으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다음은 삶은 계란이다. 요즘 SBS의 ‘인기가요’ 녹화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계란 샌드위치가 유행이라는데, 다음의 조리법으로 아주 잘 어울리는 계란을 삶을 수 있다. 냄비에 계란을 담고 찬물을 잠길 만큼 붓는다. 불에 올려 물이 끓자마자 끄고 그대로, 뚜껑을 덮은 채로 6분 30초 두었다가 찬물에 식힌다. 흰자와 노른자가 한결같이 보들보들하게 익는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 노른자 주변의 흰자가 유난히 물컹거린다면 30초 더 삶는다. 요약하자면 물이 끓으면 불을 끈 뒤 그대로 6~7분이다. 냄비의 뜨거운 물을 싱크대에 버리고 찬물을 부어 식히면서 계란을 가볍게 뒤적여 준다. 껍데기에 자잘한 금이 가 벗기기가 한결 쉬워진다.
껍데기 색에 따라 계란 맛도 다를까
반찬을 만들 만큼의 의욕은 없지만 밥이라도 따뜻하게 지어 맛있게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계란 간장 버터밥이 최적의 메뉴인데, 날계란보다 적당히 익힌 ‘서니 사이드 업’을 선호한다. 논스틱(코팅 방식의 일종) 팬을 중불에 올리고 올리브기름 또는 식용유를 3큰술 두른다. 기름을 달구는 사이 체나 자잘한 구멍이 뚫린 국자 위에 계란을 한 개씩 까서 올려 묽은 흰자를 걷어낸 뒤 종지에 담는다. 기름이 반짝이며 흐르는 것처럼 보일 때 계란을 올리고 소금과 후추로 간한 뒤, 팬을 몸 쪽으로 살짝 기울여 끓는 기름을 익는 계란 위에 떠 끼얹는다. 흰자에만 기름을 올리면 가장자리가 바삭하고 고소하게 익고, 노른자 위에 끼얹으면 적당히 익은 서니사이드업이 된다. 이제는 귀해진 간짜장 위의 계란 ‘후라이’와 꽤 흡사하다. 한편 밥을 비빌 때 간장 대신 요즘 인기인 ‘계란에 뿌리는 간장 소스’를 쓰면 덜 짠 가운데 다시마 등의 감칠맛을 다채롭게 더할 수 있다.
계란을 받치는 채. 흰자의 묽은 가장자리를 걸러낼 때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
마지막으로 조리법만큼 중요한 한 가지. 세간의 믿음처럼 껍데기의 색이 계란의 맛이나 영양가에 영향을 미칠까? 1996년 6월, 논산 훈련소를 퇴소해 밤새 기차를 타고 의정부의 보충대에 도착했다. 아침 식사로 바닥이 온통 긁혀 까진 플라스틱 식판에 흰 계란이 담겨 등장했다. 갈색 외의 계란을 못 본지가 너무 오래인지라 폐품 같은 식판 위의 희디 흰 계란이 괴기하도록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가가 더 높다는 통념 탓에 갈색 계란이 오래 대세를 누려 왔다. 요즘 들어 흰 계란의 조금씩 비율이 늘고 있는 가운데, 계란의 껍데기 색깔과 영양 혹은 맛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닭의 품종이 색깔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레그혼이 흰색, 뉴햄프셔나 로드 아일랜드 레드가 갈색 알을 낳는다. 흰 계란이다, 갈색 계란이다... 이런 논란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음식에 대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는 재료를 이해하고 좀 더 잘 익혀 먹기 위한 공감대 형성이 더 절실하다. 흔하디 흔한 계란부터 말이다.
갖춰두면 편리한 계란 조리도구
구멍 뚫린 국자. 흰자의 묽은 가장자리를 걸러내 부침이나 수란을 훨씬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계란 조리에 유용한 도구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구멍 뚫린 국자이다. 흰자의 묽은 가장자리를 걸러내 부침이나 수란을 훨씬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 채소(브로콜리)나 파스타(뇨키) 등을 건지는데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없다면 차 거름망이나 눈이 고운 강판을 급한 대로 쓸 수 있다. 다음은 계란 자르개 (egg slicer)이다. 삶은 계란을 한 번에 고르고 깔끔하게 썰어주며, 노른자가 칼날에 붙어 뭉개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양송이도 똑같이 고르게 썰 수 있는 건 덤이다. 한편 노른자가 완전히 굳지 않은 반숙 계란이라면 치실로 가르는 게 좋다. 일본 라멘집에서 흔히 쓰는 요령으로, 망원동의 ‘베라보’ 같은 곳에서 열린 주방을 통해 계란 가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같은 원리로 브리나 카망베르 같은 부드러운 치즈도 매끈하게 잘라낼 수 있으니 치아 건강 외에 일석삼조이다. 다만 계란이든 치즈든 본래의 맛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향이 배지 않은 제품을 쓴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