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부터 이쑤시개 길이까지… 지휘자의 열한 번째 손가락 지휘봉
작곡가가 둘둘 만 악보 뭉치를 휘두르거나, 오케스트라 악장이 바이올린 활을 사용하던 시기를 지나, 19세기가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지휘봉이 자리잡게 됐다. 지휘자의 상징인 지휘봉은 ‘열한 번째 손가락’으로 불린다. 게티이미지뱅크 |
서른 명이 넘는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활을 움직이고, 현악기와 관악기가 풍성한 색채감을 드러내며 선율을 만들어가는 건 오케스트라의 묘미다. 연주자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이 황홀함은 포디움에서 100명이 넘는 단원들을 이끄는 지휘자가 좌우한다.
이 지휘자의 ‘열한 번째 손가락’ 또는 ‘팔의 연장선’으로 불리는 게 지휘봉이다. 지휘봉을 든 손으로는 박자를, 다른 손으로는 강약의 표현과 호흡을 지시하는 지휘자의 손끝에 모든 연주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지휘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객석에서는 자세히 보기 어렵지만, 지휘봉은 각양각색이다. 사용 여부는 물론, 즐겨 쓰는 길이와 재질도 모두 지휘자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휘봉은 가늘고 기다란 막대 부분인 케인과 손잡이 부분인 핸들로 구성된다. 나무, 탄소섬유,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케인 끝에 코르크로 된 핸들을 더한다. 지휘봉의 평균 길이는 30㎝ 내외, 무게는 5~10g 안팎이다. 이건 통상의 경우일 뿐, 50㎝에 달하는 지휘봉을 쓰는 지휘자도 있다.
코르크도 물방울 모양, 기다란 모양 등 다양해 지휘자는 자신의 손에 편한 형태를 고른다. 지휘봉의 무게는 대부분 케인 부분이 차지하기 때문에, 무게 중심을 손잡이 쪽으로 옮기기 위해 코르크 부분에 쇳덩이를 넣는다.
이런 모양의 지휘봉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이전에는 작곡가가 악보를 둘둘 말아 박자를 세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에는 긴 막대기로 바닥을 내리치며 박자를 맞췄고, 18세기에는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바이올린 활로 지휘하기도 했다.
다양한 길이와 모양의 지휘봉. 그래도 색상은 대개 흰색이다. 백윤학 지휘자 제공 |
이토록 다양한 지휘봉의 세계에서도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게 있다. 색상이다. 형광색으로 제작된 지휘봉도 존재하긴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지휘자들이 드는 건 대부분 흰색이나 밝은 나무 색 깔이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백윤학 지휘자는 “지휘자가 보통 어두운 옷을 입고 객석도 컴컴하기 때문에, 단원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 흰색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휘봉의 사용 여부가 갈리는 경우는 관현악 반주가 없는 합창곡을 연주 할 때다. “악기가 소리를 낼 때는 지휘봉을 사용하고, 사람의 몸으로 소리를 낼 때는 지휘자도 손을 쓴다”는 것이다.
곡의 빠르기도 영향을 준다. “여러 사람이 빠르게 달려가려면 대형을 맞춰 줄 사람이 필요하니 더 눈에 잘 띄는 지휘봉을 들 때가 많고요. 여유가 있고 부드러운 대목에서는 손을 이용하면 음악적 뉘앙스를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백윤학 지휘자)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을 이끌고 있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평소 맨손 지휘를 선호하지만, 지휘봉이 필요할 땐 이쑤시개처럼 생긴 길이 10㎝의 ‘초미니 지휘봉’을 든다.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봉은 마치 이쑤시개 같다. Chris Christodoulou |
지휘봉은 지휘자가 불편하지만 않으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 성시연 지휘자는 지휘 공부를 처음 시작한 2001년 독일에서 구입한 지휘봉을 10년 넘게 사용했다. 게오르그 솔티 국제지휘몽쿠르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2006)하는 등 의미가 담긴 지휘봉이라서다. 정명훈 지휘자는 프랑스 자택에 있는 올리브 나무의 나뭇가지를 잘라 직접 지휘봉을 만든다. 자신에게 꼭 맞는 무게와 균형감을 지닌 지휘봉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간혹 지휘자와 가까운 연주자의 보면대(악보를 펼쳐놓는 곳)에 예비 지휘봉을 올려놓는 경우도 있다. 격렬하게 지휘하다가 지휘봉이 떨어지거나, 부러지는 등 돌발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2017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석 객원 지휘자로 취임한 마르쿠스 슈텐츠는 첫 공연 리허설에서 지휘봉이 날아가 세 동강 났다. 평소 에너지 넘치는 지휘 스타일로 유명했던 게오르그 솔티(1912~1997)는 지휘봉을 너무 강하게 휘둘러 머리에 상처가 난적도 있다고 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