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에 정착해야 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을 쥐어주다
숀 탠 ‘도착’
숀 탠 '도착'. 사계절출판사 제공 |
큰 가방을 든 남자가 이상한 동물과 마주쳤다. 표정에 당혹감이 역력하다. 이 그림책의 표지다. 남자는 어딘가 낯선 땅에 ‘도착’한 것. 그렇다면 떠나온 곳도 있으리라. 어디일까, 왜 어떻게 떠나왔을까? 그리고 그가 도착한 이곳은 어디인가? 한 장 한 장 숨을 참아가며 그린 듯 섬세한 연필그림 852점이 한 마디 말없이 긴 사연을 들려준다.
남자가 떠난 곳은, 남루하지만 아내와 딸과 함께 살던 따뜻한 보금자리. 종이학, 멎은 시계, 빈 냄비, 깨진 주전자와 이 빠진 찻잔, 그리고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긴 이별인 듯 남자는 옷가지와 가족사진을 큰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서는데, 시간을 알 수 없이 암울한 도시는 거대한 짐승에게 점령당한 듯 거리마다 불길하고 긴 꼬리들이 넘실거린다. 그 거리를 지나 닿은 기차역에서 가족은 눈물로 인사를 나누고, 남자는 도시를 떠난다.
배... 대양을 건너는 거대한 배에 남자와 처지가 같아 보이는 이들이 가득한데, 불안처럼 구름이 수십 번 모양을 바꾸는 사이 배는 어느 항구에 닿는다. 생전 처음 보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 심사는 까다롭고 말은 불통이니 남자는 손짓발짓에 가족사진까지 꺼내 들고 처지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뺀다. 배 타고 온 모두가 그럴 것이다. 마침내 입국허가를 받은 남자는 머물 곳을 찾아간다. 이제 일자리를 구해 생존의 조건을 마련해야 하리라.
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낯설다. 말도 글도 풀과 나무도 날짐승 길짐승도 음식과 제도도... 낯섦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굴종으로 이어지나 종종 폭력을 부르기도 하니, 숙소에서 낯선 동물을 마주친 남자는 몽둥이부터 집어 든다. 알고 보니 저 살던 세상의 강아지 같은 동물인데. 그가 묵게 된 숙소 건물에는 그처럼 굴종과 방어적 폭력 사이 복잡한 심경이 깃든 창문들이 수없이 많다. 이 남자의 이야기는 그들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낯선 땅에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누가 이들의 적응을 돕는가? 남자가 버스표 사는 것을 도와준 이는 아동노동에 시달리던 고향 땅을 탈출해 이곳에 정착한 여성이었고, 식료품 구입을 도와준 이는 인종청소를 피해 온 일가족이었으며, 어렵게 취직한 공장에서 짧은 휴식 시간에 물 한 잔을 건네준 이는 전쟁에 동원되어 숱한 동료들과 한쪽 다리를 잃은 뒤 고국을 떠난 늙은 상이 병사였으니, 이 그림책은 ‘난민의, 난민에 의한, 새 세상 적응기’인 셈이다.
숀 탠의 '도착'. 사계절출판사 제공 |
그렇게 적응한 남자는 이윽고 슬픈 고향의 가족에게 일자리와 머물 곳을 마련했다는 소식과 약간의 돈을 담은 기쁜 편지를 띄운다. 그러고도 네 번의 계절이 바뀐 뒤에야 아내와 딸이 이곳을 찾아오니, 재회의 순간 낯선 새들과 낯선 짐승과 낯선 공기마저 잠시 숨을 멈추고 이들을 축복해 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들의 새 보금자리에, 두고 온 것들과는 다른 이곳의 종이학과 이곳의 시계와 이곳의 음식 대접, 이곳의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다. 그리고 변함없이 단란한 가족사진. 이제 익숙해진 딸아이가 식료품 가게로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두리번거리는 여자를 보고 다가가 길을 안내해 준다. 표지의 남자처럼 여자도 큰 가방을 들고 있고 이상한 동물도 그 앞에 있는데, 그 사이에 배려가 있어서인가 여자의 표정은 당혹스럽지 않다.
- 도착
- 숀탠 지음
- 사계절출판사 발행ㆍ136쪽ㆍ2만3,000원
난민 몇 백 명이 이 땅에 도착했다고 논란이 분분하다. 섬보다도 고립된 분단의 땅에 살아와 낯선 존재들에 대한 공포가 큰 탓일까. 그러나 난민들에게 우리와 이 땅이 훨씬 낯설고 두려우리라. 오랜 세월 숱한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겪어오면서 우리 또한 난민 혹은 잠재적 난민으로 살아왔다. 재난을 피해 생존을 찾아온 그들이 이곳의 종이학을 접으며 변함없이 가족을 지켜갈 수 있도록, 다가가 길을 일러줌이 인지상정 아닐까.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