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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여행작가, ‘제대로 여행’ 하고 싶어 찾아간 곳

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강원 화천


일로 하던 여행, 싫어졌던 시간

카메라 내려놓고 즐거움 찾아

유년 시절 ‘평화의 댐’ 기억 화천

‘민통선 북상’ 케이블카 등 명소

한겨레

강원도 화천 파로호의 새벽 물안개.

강원도 화천에 왔다. 읍내는 작았고 한적했다. 누군가 얼기설기 급하게 만들어 놓은 세트장 같았다. 낡은 버스가 세워진 터미널 앞에는 수달 동상과, 군인들이 계급장을 다는 수선집과 카페, 음식점 몇 곳이 무심하게 서 있었다.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제법 지나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눈개승마’라는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을 파는 집을 발견하고는 들어갔다.


밥을 주문하고 스마트폰으로 ‘눈개승마’를 검색해 보니 강원도 고산지대에서 주로 나는데, 항산화 효과가 있어 노화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흠, 노화 방지라…메뉴는 제대로 골랐군.’ 나물은 부드러웠고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났다. 세 가지 맛이 나 삼나물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간이 조금 심심했는데 오히려 좋았다. 이제 오십인 내 위에는 소스를 잔뜩 뿌린 음식은 조금 부담스럽다. 세상에는 나이에 맞는 음식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졌다.

한겨레

눈개승마 솥밥.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화천은 처음 왔다. 20년 넘게 여행 작가로 일했지만, 가본 곳보다는 안 가본 곳이 훨씬 많다. 독자들에게 “작가님이 아직 안 가본 데가 있다니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겸연쩍다. 얼마 전 동료 여행 작가와 아직 한국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화천도 그중 한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옆에 자리한 카페로 가 커다란 팥빙수를 시켰다. 아주 곱게 간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 그릇 속에는 테니스공만 한 짙은 갈색의 팥 덩어리가 당당하게 올려져 있었다. 사실 팥빙수는 취재를 온 여행 작가가 먹을 만한 음식은 아니다. 팥빙수로 아주 유명한 카페라면 모르겠지만, 대개의 여행 작가는 지역의 향토 요리를 먹고 난 후에는 커피를 테이크아웃한 다음, 차를 몰고는 다음 취재지를 향해 후다닥 떠나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다. 하지만 나는 취재를 온 게 아니라 여행을 온 것이니 팥빙수를 먹어도 된다는 말씀.


고백하자면,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작가’다. 여행이 일이 되면 여행이 싫어진다. 회사원이 회사에 가기 싫어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20년 동안 여행을 일로 여기며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런 내가 어느 날 문득 여행을 하고 싶어진 것이다. 정말이다.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처럼 강렬하게 든 건 처음이다. 왜일까. 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 것일까.


코로나가 창궐하는 동안 나는 여행하지 못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숭고하고도 절박한 이유로 이런저런 일을 벌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지쳐갔던 것 같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400m 트랙을 스무 바퀴는 돈 것 같은 기진맥진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 의뢰를 받아 여행을 가게 됐다. 카메라도 다 처분해 버린 터라, 스마트폰만 주머니에 넣고 갔다. 물론 클라이언트에게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메지 않고 여행을 떠나보기는 여행 작가로 일하기 시작한 후 처음인 것 같았다. 25년 만이었다.


그런데 좋았다. 카메라 없이 떠나는 여행이 이렇게 좋다니! 아니, 여행이란 게 원래 좋은 것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억울해졌다. ‘아니, 고작 이 이유 때문이었어?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이 좋아질 수가 있는 거였어?’ 아, 몰라. 그런 건 여행을 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지금까지 많은 취재 여행을 했지만,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여행 좀 해 보자’ 하고 생각했다. 내게 아직 관절이 남아있을 때 열심히 쏘다니자.(스마트폰만 달랑 들고 떠난 취재 여행은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자!’ 하고는 화천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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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평화의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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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하면 떠오르는 곳이 ‘평화의 댐’이다. 1986년 북한의 금강산댐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몇 번의 ‘수공’(水攻)을 막아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커다란 호수를 건너야 했는데, 늦여름 햇빛이 뿌리는 수면에는 물비늘이 반짝이다가 곧 사라지곤 했다. 댐을 만들 때 나는 까까머리 어린 학생이었고 기꺼이 성금을 냈다. 지금은 아주 우스운 이유지만, 뭐 그때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죽은 어느 독재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을 때다. 나는 쌀 두 홉을 냈는데, 그때는 성금을 쌀로 내도 됐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배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단조로웠다. 양옆으로 병풍처럼 산이 지나갔다. 무미건조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 이제 세상은 변했고, 게다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나는 나이가 많이 들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여행을 해야 할 것일까. 여행이 생업이었고, 여행을 운명이라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건 과연 운명이 맞았을까. 문득 여행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표를 사기 위해서는 매표소에 가야 했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야 했던, 더없이 단순하고 순진했던 시절. 성금으로 편지 봉투에 쌀을 담아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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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장’ 촬영지에서 라면 한 그릇

그렇다고 지나온 세월에 대해 후회한다는 건 아니다. 후회가 없어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회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대신 아쉬운 것이 많다. 내가 갈 수 있는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고, 뭔가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감정이 힘없이 시들어 가고/ 예전에 밝게 타오르던 사상의 불꽃도 이울어 가니/ 세상이 앗아가는 기쁨도 없고/ 세상이 줄 수 있는 기쁨도 없네” 하고 노래한 건 바이런이었나. 시간을 딱 5년 전으로만 되돌릴 수 있다면, 내게 남은 시간을 딱 5년만 빌려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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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장’ 촬영지인 원천상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원천상회’라는 곳에 들러 라면으로 저녁을 먹었다. 티브이(TV)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티브이를 열심히 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은 챙겨서 보았다. 차태현과 조인성의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와 마음이 너무 보기 좋았다. 보는 내내 이런 작은 마을에서 슈퍼나 하나 꾸리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티브이 프로그램이니까 저렇게 평화롭게만 보이지, 사실 사는 건 다 똑같은 것 아니겠어? 나름 힘든 점이 많을 거야’ 하고 지금의 삶을 변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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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상회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끓여준 라면.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요즘엔 관광객들이 많이 안 오나 봐요.” 아주머니는 웃기만 했다. “라면 하나 주세요. 근데 대게라면은 없네요?” “대게가 요즘 안 들어와요. 겨울이나 돼야지.” 나는 파가 많이 들어간 라면 하나를 먹었다. 맛있었다. 라면을 먹는 동안 학생이 음료수를 사 가고 동네 할머니가 차표를 사러 왔다.


라면을 다 먹고 가게를 나왔다. 나는 지금 어두운 밤길을 되짚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인생은 거창한 목표를 이루어야 제대로 산 것이고, 여행은 장대한 풍경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의 성공담을 들어도, 현지인들과 어울려 떠들썩한 저녁을 즐겼다는 다른 사람의 여행담을 들어도 ‘아, 그렇군’ 하고서는 그걸로 끝이다. 내게는 내 인생이 있고, 여행은 뭘 해도 여행이니까. 여행은 안 가본 곳에 가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로등이 규칙적으로 차창을 스치듯, 시간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팥빙수가 스르르 녹아 없어지듯, 화천에서의 오늘 일들도 점점 희미해져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겠지. 커다란 댐에 가득 모여 있는 어두운 물빛을 바라보며 겨우 쌀 두 홉 거리의 옛일을 떠올리던 시간은 더 먼 먼 옛날 일이 되어 있겠지. 삶이든 여행이든 내가 만족감을 느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우리가 닿는 곳은 어차피 같은 곳일 테니까. 나는 전방을 주의 깊게 살피며 차를 몰았다.

비수구미와 파로호 자전거길

화천 더 여행하고 싶다면 갈 만한 곳이 몇 곳 더 있다. 춘천에서 고작 30분 거리. 하지만 춘천과는 전혀 다른 풍경, 전혀 다른 즐길 거리를 안겨주는 곳이 화천이다.


비수구미는 한국의 대표 오지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 화천 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고립돼 생겼다. ‘신비한 물이 만들어내는 아홉 가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했다’(秘水九美)는 뜻을 담고 있다. 전기가 88올림픽 이후인 1989년에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비수구미가 알려지게 된 건 1998년.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해서 매스컴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부터다. 결국 ‘고양이과의 큰 동물’로 결론이 났지만 이후 오지마을로 서서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트레킹을 할 수 있으며 민박집이 있다. 낙석 때문에 도로가 가끔 막히니 참고하자.


백암산 케이블카는 민간인통제선을 북상해 오가는 국내 유일의 케이블카다. 정상의 해발고도 역시 1178m로 국내에서 가장 높다. 백암산 정상에서 북 금강산댐까지 거리는 고작 16.69㎞다. 전망대에서는 민통선 이북 쪽을 관찰할 수 있다. 군부대 작전상 이유로 백암산 케이블카는 누리집을 통한 사전예약제로만 운영한다. 백암산은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1953년 휴전을 앞두고 국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2만7216명을 사살하는 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비목’의 무대가 바로 백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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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판에 타르를 칠한 꺼먹다리.

파로호 100리 산소길도 있다. 화천은 자전거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다. 화천 시내에 바로 붙어 있는 붕어섬을 기점으로 북한강을 따라 자전거길이 42㎞ 이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꺼먹다리’라는, 말 그대로 시커먼 다리를 만난다. 1945년 만들어졌는데, 나무로 만든 상판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영화 ‘전우’와 ‘산골소년의 사랑 이야기’의 배경이 된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거례리 사랑나무는 수령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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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읍내에 있는 ‘산타클로스 우체국’.

화천 읍내에는 유독 눈에 띄는 빨간 건물 한 채가 있다. ‘산타클로스우체국 대한민국 본점’이라는 큰 간판을 달고 있다. 실제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체국이다. 1년 365일 언제든 보내도 된다. 우체국 내에는 산타클로스 인형과 크리스마스 관련 소품, 엽서, 기념품 등도 판매하고 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서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받을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한다.


맛집도 빼놓을 수 없다. 화천의 특산물 ‘눈개승마’로 만든 솥밥은 ‘삼나물 밥상’(033-442-2224)에서 맛볼 수 있다. 대이리의 ‘콩사랑’(033-442-2114)은 콩요리 정식, 모둠보쌈 등을 맛깔스럽게 내놓는다. 간동면사무소 앞에 자리한 ‘유촌식당’(033-442-5062)은 화천군민이 사랑하는 막국수 집이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직접 뽑은 메밀면을 가득 담아 내온다. 압권은 감자를 직접 갈아 부쳐낸 감자전. 쫀득한 식감이 최고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 작가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지은 책으로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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